달리기의 천재 치타의 슬픔
월간 목마르거든 7.8월호
과학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칠지 자고 나면 달라지는 변화 속도에 그저 놀라움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기가 더해지는 세상이다 보니, 이에 적응하려는 노인 세대의 노력이 눈물겹고, 지친 나머지 두 손 들고 스스로 문명의 청맹과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도 안타까운 오늘의 일이다. 이미 4차 산업시대와 5G의 빠르기를 실현한 인간의 문명은 어디까지 이를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생기고, 순기능이 있으면 역기능이 따르는 이치인데, 마치 한 방향으로만 내달리는 모습이 사바나의 생존 세계를 연상시킨다. 한쪽은 먹이를 향해 질주하고, 다른 한쪽은 생존을 위해 달려야 하는 약육강식의 초원에서는 딱 한 가지, 누가 더 빠르냐의 시합으로 사느냐 죽느냐가 결판난다. 그러다 보니 육상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처럼 육식동물이나 초식동물이나 매일같이 자기만의 주법으로 고된 속도의 훈련을 거듭해야만 한다.
땅 위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이 치타라고 들었다. 시속 120km까지 주파가 가능하다고 하니 가히 달리기의 천재이다. 사바나의 사냥터에서 치타만큼 유리한 조건을 지닌 동물도 없다. 사자나 표범은 먹이 앞에 20-30m 정도 접근한 후에야 사냥을 개시하지만, 치타는 먼 거리에서도 쏜살같이 달려가 사냥할 수 있다. 그래서 사냥 성공률이 30% 전후에 머무는 사자나 표범에 비해 치타는 40%를 웃도는 성공률로 작은 초식동물에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치타의 빠른 속도는 오랜 기간에 걸친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치타가 즐겨 사냥하는 동물은 가젤 영양이다. 가젤 영양은 몸집이 작은 데다 워낙 날렵해서 몸집이 큰 육식동물들이 사냥을 하기에는 이런저런 애로가 있었다. 치타는 이들이 공격하기 어려운 틈새시장을 파고들어서 가젤 영양 사냥에 적합한 신체구조로 진화하는 데 성공했다.
최대한의 산소를 들이켤 수 있게 폐를 키워서 호흡 횟수를 분당 60회에서 150회로 올리고, 보다 많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간, 동맥, 심장을 확대했다. 또한 다리와 등뼈는 더 빨리 유연하게 뛸 수 있도록 가늘고 길게 바꾸었다. 심지어 바람의 저항을 줄이려고 턱과 이빨 크기를 줄이고, 몸을 날렵하게 하려고 몸무게를 40-50kg의 이상적인 체형을 만들었다.
이 같이 줄기찬 전문화를 꾀해 치타는 단 몇 걸음 만에 시속 64km까지 끌어올리고, 1초에 7m씩 세 번 뛸 수 있게 진화해 말 그대로 ‘바람의 파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속도를 목표로 신체 구조를 진화시킨 것까지는 좋으나, 이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데서 취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치타는 사냥 성공률이 높은 대신, 왜소한 체격 탓에 애써 잡은 먹이를 절반 이상 빼앗겨야 했다.
표범은 사자나 하이에나를 피해서 먹잇감을 나무 위로 갖고 올라가지만, 치타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애써 자신이 사냥한 먹이를 강탈당하고 물러서야 할 때, 치타의 마음은 얼마나 슬프고 쓸쓸할까. 또 다른 문제는 먹이의 다양화에서도 섬세하지 못했다. 치타의 주 먹잇감은 가젤 영양인데, 개체수가 조금만 줄어도 치타에겐 심각한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 아프리카 개발로 초원이 줄면서 가젤 영양의 개체수가 줄었고, 육식동물 간 먹이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져 치타는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전문화는 필요한 전략이다. 선택과 집중은 모든 삶의 방식에서 통하는 수단이니까. 하지만 멀리 못 보고 눈앞의 일에만 전념하는 건 진정한 의미의 전문화가 아니다. 진정한 전문화는 세계적 강소기업들처럼 한 우물을 파되, 세상의 변화와 추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우물을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라는 말이 있다. 급한 욕심에 좁게 파기 시작하면 얼마 못 가 삽이나 곡괭이를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비좁아지고 결국 물은커녕 자신이 판 구덩이에 스스로를 가두는 비극을 맞게 된다.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방향을 제대로 잡고 달리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길을 들면 갈수록 돌아오는 길은 멀어질 뿐이다. 시인 노천명이 노래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은 사슴뿐이 아니다. 애써 잡은 먹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치타도 슬프긴 마찬가지이다. 더 슬픈 것은 ‘치타의 비극’이 동물의 세계에만 있지 않고,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