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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 모두 괜찮았으면 좋겠다

18-16

by 이관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죽음을 아는 것과 죽음을 경험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말과는 달리 죽음을 먼 날의 일처럼 잊고 살아가지만, 죽음을 가깝게 경험한 사람은 전혀 다른 고백이 뒤따른다. 나이가 든 모임에 나가면 흔히 듣는 이야기가 “사는 게 시들하다” “흥미 없다” 같은 비슷한 말이 오가는데, 한 번은 뇌경색으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친구가 호통을 쳤다. “이보게. 난 하루하루를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사네. 우리가 사는 1분 1초가 기적이라는 걸 모르면 입들일랑 다물게.”

‘앎’이란 때때로 ‘경험’이란 실체 앞에 허접스러운 것임을 알 때가 많다. 단 하루, 한 달, 1년만 더 살았으면…. 가슴에 맺힌 절절함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간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염원이 얼마나 날생선의 가시처럼 가슴을 찌르는 말인지를 알 수 없다.


내 주변에 아내를 앞세워 보낸 친구가 벌써 서넛이나 생겼다. 엊그제 만난 친구도 3년 전 아내를 앞세웠다. 그래도 잊을 건 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지만, 혼자 넘을 마음의 산은 태산보다 높아 보였다. 여름에 큰 딸이 마카오로 떠난다고 말했다. 세계적 브랜드 호텔의 이사로 스카우트 제의가 올 때만 해도, ‘내 걱정 말고 네 인생을 살라’고 등을 밀었는데, 막상 날이 잡히니까 마음에 한 줌 바람이 일더라고 했다.

63세의 아내를 병마로 보낼 때 그걸 인생이라 살았느냐고, 아쉬운 대로 일흔만 채웠어도 이렇게 미안하진 않을 거라고 애통해 한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자넨 행복한 줄 알게. 같이 사는 둘째 딸이 있잖아. 혼자 사는 사람들 생각해봐. 그리고 큰딸 속 깊은 것 좀 봐라. 언제든 아버지가 마카오에 오시면 룸을 내주기로 계약서에 명시했다며? 효녀다. 하늘의 아내가 뿌듯해하겠다.”


그제서 친구 얼굴에 엷은 미소가 지폈다. 그건 그렇다면서. 나이 들면 결국 남는 건 가까이 있는 가족뿐이다. 엊그제 점심을 함께 한 존경하는 선배도 자녀가 해외에 사는 게 자랑이 아니라며 헛헛해했다. 10년 전 국내 대기업의 미국 주재원으로 나갈 때만 해도 지식은 그분의 자랑이었다. 세 번이나 주재원 연장 근무를 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결국 귀국 발령을 받고서야 고민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서울에 계시는 연로한 부모님과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녀들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결심을 했단다. 애들 교육을 위해 미국에 남기로.


아들이 사표를 내려고 일시 귀국했을 때만 해도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너희들 인생을 사는 것이니까 부모 일은 신경 쓰지 말라”라고 이해를 했는데,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지 몇 달 뒤 주민센터에서 서류를 떼다 당황했다. 가족 난에 아들이 해외 이주로 표기돼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묘한 감정이 일렁이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사는 것 하고 주민등록에서 말소되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느낌이라고.


또 다른 친구는 아내와 사별한 지 7년이 되었다. 역시 60대에 남편 곁을 떠났다. 5년간의 병시중 끝이라 좀은 홀가분할 법도 한데 “1년만 더 살았으면”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여전히 비원으로 남아 있었다. “떠난 지 3년까진 정말 힘들더라. 5년 되니까 좀 낫긴 해도.” 그래도 웃는 얼굴에 그리움이 일렁이었다. 아들이 집을 정리해 아버지가 사는 아파트 앞동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효자라서 좋겠다고 덕담을 했다. 그 친구의 취미는 경기도 일원의 오일장을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세상의 풍경과 풍물을 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오늘은 용문 5일장에 갔던 얘기를 해서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는 옛날 고향 장터를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흥정도 하고 토산물을 샀다. 그러다 시장기를 느끼고 장터에 생긴 식당에 들어갔다. 화창한 날씨가 마음을 흔들었는지 국밥에다 평소 입에도 안 대는 막걸리도 한 병을 주문했다. 결국 술은 한 잔도 못 마시고 옆 테이블에 넘겼다가 합석까지 하게 되었다. 연배가 비슷한 구로에서 왔다는 옆자리 남자와는 통성명을 했다.


평소 남에게 각박한 소리를 못하는 친구의 성품을 알아봤는지 남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연신 말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아들이 한 주 용돈으로 3만 원을 주면, 이렇게 장날 찾아다니며 술도 한 잔 하고 말벗도 삼는 게 낙이라며 주절주절…. 적당히 듣고 일어섰어야 했는데 매정하게 끊지 못하고 구로동에서 왔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시간 넘게 들어야 했다. 시계를 보고 더는 안 되겠다고 싶어 일어서자 그도 같이 가겠면서 따라 일어났다.

얼떨결에 친구는 그와 함께 전철을 탔다. 친구가 내리는 덕소역까지 며느리 흉보고, 아들 자랑하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남자를 상대하느라 고역을 치렀다면서 용문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내게 전해주었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그러겠나. 자넨 행복한 걸세. 그런 아들 며느리가 어디 있나? 홀아버지 돌보려고 앞 동으로 이사까지 오는, 그런 자식 요즘 흔하지 않네.”

그러자 친구도 같은 생각이라며 며느리를 칭찬했다.


그날 친구는 좋은 일을 했다. 끝까지 싫은 표정 안 하고 남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수양을 넘어 덕을 쌓는 일일 테니까. 남에게 후한 친구여서 사는 것도 편하게 살 것으로 주위에서 알지만, 그렇다고 태산보다 높은 마음의 산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친구 앞을 가로막고 선 벽은 높아 보였다.


친구와 헤어지면서 그래도 오늘 우리는 한 가지를 확인했다. 얼마나 대화가 궁했으면 생면부지의 자네를 붙잡고 자신의 처지를 털어놨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우린 행복한 사람’이라고 입을 맞추었다. 나에게 오늘이 있어 좋고, 같이 할 친구가 있어 좋고, 함께할 따뜻한 가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하루하루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문장을 하나를 떠올리고 친구에게 카톡을 날렸다.

❝기적은 하늘을 날고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깨닫고 즐겁게 사는 사람은 진실로 행복을 아는 사람'아라는 말과 함께.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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