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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서막, 김장의 추억

18-15

by 이관순

11월은 가려진 달이다. 앞뒤로 개성이 강한 두 달 사이에 낀 달이 되어 쓸쓸한 이미지를 내지만, 11월만큼 주부들 마음이 바빠지는 때도 없다. 겨울을 앞두고 김장과 수능이라는 넘어야 할 두 개의 큰 허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태가 달라져 주부의 절반이 김장을 하지 않는다 해도, 11월이 되면 집집의 걱정은 누가 뭐래도 김장이 아닐까? 우리처럼 나이가 든 사람은 11월이 가기 전에 김장 김치 맛을 봐야 겨울나기가 편해진다는 심리적 안정이 우리 세대의 익숙한 정서이다. 가가호호 대물림되는 가풍에도 김장은 한 풍속도를 그려낸다.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김장법이 아내로 물리고 며느리로 이어지면서 우리 집만의 김장 풍경을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김장과 수능이 가을과 겨울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수능 아침만 되면 뚝 떨어지는 수은주, 멀쩡하던 날도 김장하는 날이면 찬바람이 쌩쌩 불고 을씨년스러운, 기막힌 날씨의 조화를 경험하며 한 시대를 살았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날씨의 변덕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김장하는 날은 딸 며느리 다 모여 장날처럼 북적여야 제맛이고, 손을 호호 불며 수능 고사장 앞을 떠나지 못하는 학부모들을 봐야 본격적인 겨울나기의 시작으로 느껴진다.


고생은 해도 김장을 마치면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그러셨고, 아내가 그랬다. “김장했으니까. 추위가 오든 걱정 없다”라며 스스로 자위하시던 어머니…. 김장이 늦어지는 주부들 마음은 바람이 조금만 차가워져도 마음은 싱숭생숭 온통 김장 걱정으로 가득 찼다. 예부터 김장은 입동(11월 7일) 전후로 해야 김치가 제 맛을 낸다고 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60-7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월동준비로 김장김치 200포기는 기본이고, 연탄 200~300장은 들여놔야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했었다.


동면은 동물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절엔 사람에게도 겨울나기가 그만큼 힘들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요즘은 김장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20포기 많아야 50포기이지만, 200포기 김장을 하려면 그 준비가 며칠 전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배추 씻어 절여놓는 것도 일이지만 양념 준비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 마늘 까서 찧어놓고, 생강 씻어 다지고, 쪽파 씻어 썰어야지, 무 쓸어 채 만들어야 지 어디 그뿐인가. 찹쌀 풀까지 쑤다 보면, 나이까지 한 짐을 진 아내 몸은 어느새 무겁고 녹초가 되기 십상이다.


김장은 사실 준비 과정이 전부인 셈이다. 그만큼 김장 속에 들어갈 재료들을 만드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이에 비하면 마지막 과정인 속 넣는 일은 수월한 일이었다. 이렇게 여럿이 모여 힘든 일을 할 때는 우스갯소리가 양념으로 곁들여져야 제격이다.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남자들처럼, 김장하는 여자들도 실없는 농담 사이로 고단함을 풀었다. 아내를 도와 김장 준비를 하다가 어느 해 추운 날, 큰 누님이 배추 속을 넣으면서 하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독학으로 춤 공부를 끝낸 여자가 있었단다. 주말에 김장도 담가놨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동안 배운 춤 솜씨를 한 번 발휘해 보려고 용기를 내어 카바레에 갔다. 무도장에서 춤을 배울 때와 분위기와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카바레에서 난생처음 낯선 남자 파트너에 안겨 춤을 추다 보니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다. 자꾸 스텝이 꼬였다. 신경을 쓸수록 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남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귀에 대고 속삭이자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열린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네, 40포기 했어요.”


그 말에 우리 집 여자들이 뒤집어졌다. 어쩌면 성우 뺨치는 억양과 감정을 실어 나긋나긋하게 전하는 큰 누나의 이야기 솜씨에 놀랐다. 그러자 이모님이 아들 이야기라며 말꼬리를 이었다.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재수생인 아들 방에 들어갔더니 책상 위에 이런 글을 써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다!”

그래서 또 한 번 입마다 폭소가 빵 터졌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김장은 수고라고 할 것도 없으나 그래도 아내에겐 여전히 가을철 대사(大事) 임에 틀림없다. 겨우내 가족 식탁을 든든하게 지켜낼 우리 집 만능 찬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집 김장 날에 등장하는 음식은 보쌈이었다. 김장 때마다 어머니는 늘 바로 삶은 고기를 내놓았다. 나도 가족 틈에 끼어 즐겁게 보쌈을 만들어 먹었다. 양념 듬뿍한 겉절이로 수육을 말아 입안에 넣고 씹을 때의 그 환한 입맛….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 푸근했던 그 세월이 눈앞에 하늘거린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 앞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추억을 만들 때는 저승의 할머니도 어머니도 오셔서 쉽게 3 ․ 4대가 어울리는 자리가 되었다. 추석에 좋지 않은 일로 감정이 상해 돌아갔던 시누이와 올케가 만났다. 올케가 큼직하게 보쌈을 싸 시누이 입에 넣어주며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언니, 그런 소리 마. 난 다 잊었어!” 그 한 마디에 우린 천성이 가족이라며 서로를 확인하는, 그런 날이 김장 날이다. 지금도 고향에서는 품앗이 김장을 통해 농사철에 생긴 앙금을 씻어낼 것이다. 이렇게 가족끼리, 이웃끼리 화해하는 아름다운 자리를 만들던 날이 언제인가? 추억으로 돌아선 김장 날이 아련하게 흔들린다.


올해는 공교롭게 김장하기 전날, 자연유치원에 다니는 손자 손녀가 배추 한 포기씩을 받아 들고 집에 왔다. 그중 4분의 1쪽을 절여 가면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원생 어린이들이 함께 담근다는 김장 학습 안내문도 보내왔다. 손자녀들이 자기들 배추라며 곁눈질하면서 속을 넣었다. 그 바람에 저녁에는 어른들이 담근 김치와 아이들이 만든 김치가 밥상에 함께 올라와 가족들 입맛을 즐겁게 했다. 김장은 아내에게는 긴 겨울의 시작이지만, 아이들에겐 또 다른 추억의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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