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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는 늦가을이 오면 늘 생각나는 기억 하나가 있다. 막내아들 집을 찾은 어머니와 공원을 산책하는데 뜬금없이 “세상이 참 헐거워졌다”라고 말씀하셨다. “뭐가요?” 젊은 아들이 묻지만 어머니는 밍근한 웃음만 지어 보이셨다. 그때는 무엇을 말씀하는지 잘 몰랐다. 이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그 미소가 머금은 속뜻을 알 것 같다. 가을 끝을 돌다 절로 깨친 것이다.
연이틀 추적되던 가을비가 그치자 내 눈에도 문득 세상이 헐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낙엽진 거리가 성글어 보이고 공원도 휑했다.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바람도 스산해 보였다. 산 계곡 물소리는 수척해졌고, 젖은 돌계단을 밟는 사람들 표정도 쓸쓸했다. 지금은 들에도 산자락에도 이별하는 것뿐이다. 그 길을 걷다 문득 때 지난 어머니의 대답이 생각났다. ‘너도 살아보면 안다’는 것을. 시든다는 것은 돌아가기 위한 생명체의 마지막 경건한 행위임을. 어머니는 그날 자신의 돌아감을 생각하신 것이다.
한 생을 휘돌았던 뜨거운 피가 빠져나가면서 전하는 마지막 단어가 ‘시듦’이라는 말이다. 시든다는 말을 잇는 다음 단어는 ‘사위다’이다. 소리 없이 불타듯 사그라져서 재만 남는다. 아쉬울 것도 서운할 것도 없는 일생의 종언인 셈이다. 사람들은 1년이 훅 바람처럼 지나간다고 속절없어 하지만, 누구에겐 그 짧은 시간이 성심을 다해 살았던 살뜰한 생애이다. 어느 시인은 낙엽을 보고 ‘땅에다 맨몸을 뉘고 상처를 묻는다’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이 말은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드리는 경건한 미사일 수도 있겠다. 시듦이란 소임을 다한 생명이 자신의 삶을 거두는 일이니까. 그래서 ‘잘 시들면 잘 거두는 것’이고 ‘잘 죽으면 복’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세월의 속도감은 12월 들어 유난히 빠르게 느껴진다. 엊그제 꽃이 피었다 했는데 여름이 오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했는데 어느새 단풍이 들더니 그도 잠시, 비바람이 낙엽을 털어낸다. 그리고 앙상한 뼈마디로 남기까지 나무의 1년은 쉼 없이 가쁘게 돌아온 시간이었다. 우리 인생과 다를 게 없다. 우리도 한해 한해 한 주기를 돌 때마다 뜨거웠던 피는 점점 식어지고 남는 것은 시간의 매듭과 옹이들 뿐이다. 잎새들의 종언처럼 우리도 신음하지 않고 마지막 미사를 기구할 수는 없을까.
지난 주말, 도봉산에 올랐다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마른 낙엽을 밟다가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였다. 걸음마다 단단한 등산화 창에 밟히는 낙엽의 마른 신음소리를 들었다. 산행 때마다 나무뿌리 밟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친구가 생각났다. 사람들이 등산길에 드러난 나무뿌리나 등걸을 밟고 지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명에 가하는 사악한 야만 행위라고 펄쩍 뛰던 친구였다. 그는 지금도 환경단체에서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나도 가급적 나무뿌리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계절의 순환은 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나뭇잎이 돋아날 때의 향긋함, 한식 날 묘역에서 잡초를 제초할 때 나는 알싸한 풀 향기, 늦가을 떨어진 나뭇잎에서 풍기는 농익은 낙엽의 향은 얼마나 코끝을 홀리고 벌렁거리게 하던가. 푸른 잎 단풍으로, 낙엽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 가슴에 위안을 주던 잎새의 생은 그래서 경건하기조차 하다.
김동길 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아지고 모든 것이 이해될 줄 알았는데, 실은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더라고….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 취향도 바뀌었다. 넓은 길보다는 호젓한 오솔길이 좋고, 또렷함보다는 아련함이 좋아졌다. 살가움보다 무던함에 마음이 끌리고, 질러가는 것보다 에둘러 돌아가는 굽잇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자연이 스승이라는 말이 맞다. 길을 나서면 만나는 모두가 스승이라는 말도 옳다. 오늘은 하찮은 마른 낙엽이 내게 죽비를 들이댈 줄은 몰랐다. 나도 저들처럼 지난 1년의 삶을 벌거벗기고, 슬픔은 슬픔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사위어 땅에 묻어야겠다. 그리고 다시 울고 웃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월이 이렇게 소리 없이 휘감고 돌아가니 변할 것 같지 않던 얼굴도 마음도 변화를 맞는다. 어제는 친구에게 편지를 부치려고 나갔다가 공원에 들러 집에 왔는데 주머니에 편지가 그냥 있었다. 어느 시인이 그런 말을 했다. 편지를 부치려고 나갔다가 동네만 한 바퀴 돌고 들어왔다면 가을 타는 남자라고. 이래저래 가을도 끝물이다. 며칠 있으면 달력도 마지막 장으로 남을 것이다. 세상뿐 아니라, 세월도 헐거워 보이고, 덩달아 나까지 헐거워 보이는 것 같다.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