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가 그리운 시대

이관순의 손편지[29]

by 이관순

멘토(mento)가 그리운 시대

근래 습관 하나가 생겼습니다. 글이 안 써지고, 생각은 많고 착상이 안 될 때,

동화책을 봅니다. 집에 아이들이 많은 탓에 접할 책들이 많아서죠.


“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매를 많이

맞아서 생긴 아픔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유리조각에

찔린 곳을 바늘로 꿰맬 때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주인공인 다섯 살 제제는

자신을 몰라주는 가족들이 서운합니다. 아무도 제제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꼬마에게 세상은 재밌는 구경거리로 가득 합니다.


어느 날, 제제는 거리의 악사가 부르는 유행가를 배워 와 아버지 앞에서 흥얼

거리다가 된 매를 맞습니다. 어린 게 쓸데없는 노래나 배워왔다고요. 사람들이

좋아했으니까 의당 아버지도 기뻐하실 줄 알았다가 그만.


그래도 제제에겐 무슨 말이든 받아주고 토닥여 주는 뽀르뚜 아저씨가 있습니다.

그의 무릎에 앉아 재잘재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하지만 아저씨마저 기차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순간 멘토를 잃은 제제는

그러면서 깨닫지요. 사람은 성장하며 한 번쯤 커다란 슬픔을 겪는다고.

어느덧 철이 든 소년이 돼가는 겁니다.


한때 사회적 관심이 ‘멘토(mento)’에 쏠린 적이 있습니다. ‘멘토의 시대!

청춘이여, 멘토를 찾으라.’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기업과 기관들이 앞장서

멘토링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즈음 철학자 고 박이문 교수가 ‘철학인생 50년’을 기념한 자리에서 청춘들이

왜 멘토를 갈망하느냐는 질문에 답합니다.

“프랑스 젊은이는 건방질 정도로 당당하지만, 독창적인 주장을 해요. 이에 비해

우리 젊은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회라, 자신만의 생각으로 어떤 길에

나서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거지.”


하지만 삶에는 크든 작든 실패가 따르는 법, 멘토에 의존하지 말고 용기를 내

하루하루 치열한 내 삶을 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위기나 갈림길에서는 경륜과

경험의 조언을 구하라고 권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하죠. 그래서 세상을 학교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사상가, 철학가로부터 무한한 지적 통찰력과 지혜를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 작가와 수많은 책들도 좋은 스승입니다.


그런데 학교에 선생이 사라졌다면요?

우리사회가 그렇습니다. 세상은 어둑해지는데, 경륜과 지혜로 길을 밝혀 줄

멘토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희미한데, 충고해 줄 멘토가

없습니다. 사방을 돌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멘토를 거부한 걸까요? 어른도 없고 설 자리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 스스로 경륜과 경험을 청산, 적폐 대상에 올리고, 불통을 관행으로

삼지는 않았나요? 집에도, 학교에도, 사회에도 섬김의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내 주장만 요란하고 섬김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수평사회(살핌)가 온전하려면 수직(섬김, 돌봄)이 받혀야 합니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야 교차로가 생기고 길이 열리는 이치입니다.

어릴 적, 친구 집에 몰려가 떠들다가도 사랑방에서 친구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한 번에 물을 뿌린 듯 조용해집니다. 어른이란 그런 분입니다.


잊고 지내온 ‘멘토’가 시대의 갈망으로 떠오릅니다. 그런 멘토 어디 없나요?

죽비(竹篦) 치며 “내 말을 들으시오!” 외치는 사람. 나의 시선을 붙잡는 그런 사람...

파고에 흔들리는 대한민국 호 갑판에서 우리의 멘토, 이 시대의 멘토를

그리워합니다. *소설가daumcafe/leeletter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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