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란 광야에서

이관순이 손편지[30]

by 이관순

5월이란 광야에서

온 누리가 꽃 세상입니다. ‘4월을 내게 주면 나머지 달을 다 주겠다.’는 말에서 우리는 꽃에서 기쁨을 찾고 신록에서 생명의 환희를 느끼려 한 지혜를 살핍니다. 5월이 되면 지문처럼 살아나는 두 개의 충격이 있어요. 하나는 주정으로 지새던 아버지가 여남은 살 안팎의 자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턱없이 솟은 전세 비용을 마련 못한 가장이 세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은 어린 자식들을 더 가엾게 생각했었어요. 오죽했으면 자식이 아버지를 그랬을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면글면한 어머니를 때도 없이 구박하고 아이들에겐 폭군으로 군림한 비정의 아버지에게 더 많은 화살을 날렸었지요.


마음을 시리게 한 것은 자식의 손에 죽은 아버지입니다. 신병에다 실직까지 한 가장이 받는 중압감이 어떠할지는 익히 상상이 가는 일입니다. 알코올로 황폐해진 사람은 이미 정신

질환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그가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일생을 ‘아버지 죽인 자식’으로 가위 눌려 살아야 할 자식을 만드는 일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상징적 존재로 추락했습니다. 머슴이 된 아버지의 잔상이 곳곳에 낙화처럼 날립니다. 여자가 층층시하란 말은 옛말이고, 이젠 남자들이 층층이요 첩첩입니다. 동료와 경쟁하고 후배들 눈치 보며 상사에 굴신하며 실적 올리랴, 승진하랴… 평생을 경쟁과 긴장에서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전엔 아버지의 권위란 게 있었어요. 그가 집 짓는 목수라면 적어도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이라고 가리키며 자랑하는 자부심을 자식들에게 주었지만, 지금은 까마득한 수십 층 빌딩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줄 것은 왜소함뿐, 문명의 그늘에 가린 그것이 현대의 아버지 상입니다.


일가족 4명이 턱없이 오른 전세비에 갈 곳을 마련 못하고 끝내 집 설움이 없는 하늘나라로 이사를 결행한 또 다른 아버지는 우리 사회가 만든 비극이었습니다. “주님께선 좋은 아내와 귀여운 자녀를 선물로 주시는 축복을 허락하셨어요. 얼마나 행복한 가정인가….” 이렇게 시작한 유서를 남긴 가장은 우리 이웃이었습니다. 이산화탄소에 깊이 잠드는 가족 옆에서 대학 노트에 써내려간 유서에는 떨어진 눈물방울로 얼룩져 있었어요.


“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가난은 내게로 물려졌고, 기적이 없는 한 이 가난은 대물림 될 것입니다. 혼자 떠날까 했지만 남은 가족들의 앞날이 불 보듯 뻔한데….” 이렇게 계속된 유서의 마지막 구절에는 정치하는 자에게 지혜를 달라는 간절한 간구도 잊지 않은 선한 이웃이었어요.


당시 여론은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 ‘그래도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지, 동정과 질책이 비등했지만,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현실이었고 개선 또한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가위 눌린 아버지는 여전히 눌린 채로,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한숨짓고 있을 뿐이지요.


뼈아픈 것은 가난보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생명의 경시 풍조입니다. 카네기는 “이웃이 굶든 자기 두통에나 신경 쓰는 것”이 문명사회라고 비난했지만, 이웃이 죽은 지 나흘 만에 발견돼도 예사롭지 않게 취급되는 세상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세닢 주고 집 사고 천냥 주고 이웃 산다.” 는 속담처럼 더없이 중요한 게 이웃인데, 이 소중한 가치가 언제 아스팔트 위로 버려진 걸까. 물 오른 수목과 푸름을 더하는 신록, 힘차게 키를 돋우는 풀포기들…. 꽃향기에 아이들 웃음소리까지 5월은 생명의 은총으로 화합하는데, 사람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산하에 차오른 생명의 기운은 자연의 화해에서 생겨납니다. 화해 없는 자연은 생명을 키울 수 없는 황무지가 되듯, 이웃과 화목함이 없는 삶이라면 숨 쉬는 주검에 다름 아닙니다. 가정의 달에 깊어지는 상념은 광야로 내몰리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5월만이라도 음지의 이웃을 살피는 날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가정의 달’은 그렇게 완성돼야 할 터인데. (소설가daumcafe/leeletter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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