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19]
오늘을 ‘반짝반짝’ 빛나게 살자
11월은 참 애매한 달입니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회색지대란 생각에서죠.
하늘에 떠 있는 쓸쓸한 낮달과도 같습니다.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린 날,
아차산에 올랐다가 수년 전의 기억에 잠겨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가을마다 우리 3형제 내외 여섯이 25년을 함께 한 즐거움인데 그해 가을엔
큰 형님 자리가 비었습니다. 가장 건강했던 분이, 가장 오래 사실 것이라고
했던 분이, 세상을 등지신 것입니다. 여행 때마다 늘 앞장을 서서 계획을
세우고 형제들의 먹거리와 잠자리를 준비해 주시던 분입니다.
그러면서 여행은 한 차로 다녀야 제 맛이 난다며 카니발 한 대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었지요. 이제는 카니발 리무진도 마련했는데 타는 사람이
다섯뿐입니다.
갑자기 몸집이 훌쭉해진 것 같고, 헐렁한 옷을 입은 것 같이 낯설었습니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생각이 여행 내내 떠나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실감했습니다.
900km를 운행하면서 남은 다섯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무래도
빈자리의 주인공인 큰 형님과의 추억이 많았습니다. 흔히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마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짧음으로 대추나무에 대추알
열리듯 어떻게 그리도 많은 기억과 추억을 남기고 갈 수 있느냐는
의문 때문이었죠.
고구마 줄기처럼 잡아당길 때마다 크고 작은 추억의 뒤안길로 연신
불러내니 말입니다. 가을 벌판 위를 그런 기억들로 채우면서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 다섯이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축대에서 돌 하나 빠지고 나니 갑자기 전체가 위태롭게 느껴진 겁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 산하가 유난히 눈부셨습니다. 주로 꺼낸 대화의 주제는
이 세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해야 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했어야만 했는데.”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들이 세 가지로
짚어낸 시인의 통찰이 새삼 어둠 속 불빛으로 찾아옵니다.
그 불빛에 어른거리는 아쉬움, 연민, 미련, 후회, 미안함 같은 어휘들.
마치 인생 참회록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을은 소란스러운 계절이 아닙니다. 단풍 찾아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그러한 행락 철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몸에 눌어붙은 욕심과
삶의 얼룩을 닦고 내면 깊이 침잠해 있는 나를 찾아
만나는 절기라고 생각해서지요. 안 쓰던 일기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에서 경건한 생명들의 아름다움이 빛납니다.
단풍 진 나뭇잎을 털어내며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들, 무성했던 생명들이
사라진 저 휑한 들판,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과일들의 소회는 무엇일까.
그러면서 떠오릅니다. 내 인생도 가을이 짙어졌는데 어디에다 낫을 댈 수
있으려나. 스산한 바람이 나이만큼 차오릅니다.
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물질이 곤궁한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광야에 홀로 선 나무처럼 느껴지는 외로움도 무척
삶을 힘들게 합니다. 더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입니다.
옆에 있다면, 온갖 걸 다 해줄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없을 때 그 열패감은,
밑을 모를 만큼 깊고 광대하겠지요. 오늘이 그를 사랑할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이 그와 나누는 대화의 마지막 끝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내일에다 미루지 마십시오. 후회는 매번 내일에
일어나니까요.
내일은 상상 속에나 있는 것. 아무도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습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내일을 기약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요. 생각 없이 한
말이면 철부지 약속이고, 알면서 한 것이라면 비겁한 발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껴야 할 사람이 옆에
있을 때, 오늘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세요. 내일 하려던 사랑은 가불 해서
오늘에 투자하세요. 그것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부모형제이든, 친구이든,
아니면 나만의 누구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은 후진도 모르고 유예도 없는,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직진형입니다.
오늘이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움, 원망의 자리에
이로, 격려, 사랑을 가득 채워서요.
지금 내 손에 쥔 시간만이 확실한 내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