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18]
소멸하는 인생이 축복이라고?
배롱나무 꽃이 진 걸 보고 여름이 끝났음을 알았지요. 뜨거운 폭양 아래
절조를 지키면서 여름 한 철을 홀로 지켜온 꽃입니다. 꽃이 오래간다고
해 나무 백일홍으로도 불립니다.
사찰이나 서원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마음의 욕망을 벗고 공부에
전념하라 “는 뜻이 있어요. 붉은 꽃이지만 화사하지 않고, 기품이 있고
아름답고 수려한 꽃입니다.
존재를 뒤늦게 알아챈 것이 꽃에게 좀은 미안할 따름입니다. 몇 년 전,
초가을 남산 숲길을 걷다가 “저 꽃 이름이 뭐지?” 함께 했던 친구에게
묻자 ‘배롱나무 꽃’이라고 알려줍니다.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꽃, 묘한 매력에 끌려 그로부터 나의 여름 꽃이
되어준 배롱나무 꽃. 올해도 가로수 길, 동네 어귀, 산길, 공원 등 곳곳에
풍성한 꽃을 피워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했는데 이젠 사라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 꼿꼿했던 초록이 나무에서 떠나갑니다. 나무는 빠르게 가을빛을 찾아
나섭니다. 모든 것이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모든 생명이, 자연현상이,
질서를 좇아 흘러가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합니다. 꽃도
피었다가 지니 아름답지, 사철에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이나 제대로 줄까.
시간도 흘러가고 생각도 따라가요. 즐거웠던 하루도, 마음을 아프게 했던
슬픈 날도 지나간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을 들게 합니다. 분노도 괴로움도
애증도 다 지나갈 것이니 감사하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하지만 해질 녘
나루터에서 바라본 고운 노을에 넋을 잃다가 그것이 낙조인 것을 알 때,
그마저 사라지는 것을 보노라면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납니다.
어느 자리에서 젊은 친구가 인사를 합니다.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제자라고 하네요. 강의 내용을 또렷이 기억하는 걸로 보아 사실 관계는
분명해 보입니다.
수업이 인상적이었다며 기억을 떠올릴 때쯤, 아, 그래 그랬지, 그제서
윤곽이 잡힙니다. 내가 은사님에게서 받은 학습법을 똑 같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날 나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왜 지나간 시절을 이름답다 생각할까?”
라고 물었습니다.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나름의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하게 했던 기억이
어렴풋 살아납니다.
지나간 것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생명은 유한하기에 소중하며, 저녁노을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이지요.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불멸이란 것도 재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에는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던 한 인간의 비극적 종말이 나옵니다.
불멸의 대가로 얻은 것은 영혼의 파멸이었습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소멸함을 일찍이 인지하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반대로 그것만큼
인간에게 축복이 되는 것도 없을 듯합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예찬하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들의 사랑이 그토록 절절하고 아름다운 것일 테니까요.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애잔합니다. 유한한 삶을 사는 것이기에 우리는
살아가는 그때그때의 의미를 찾고, 보다 충실하려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