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미 인문계 고등학교(2) >
이듬해는 1학년 부장 선생님과 같이 1학년 담임을 한 몇몇 선생님과 함께 자연스레 2학년 담임으로 배정을 받았고, 합을 맞춰 나갔다. 이 과정에서 부장 선생님이 부족한 나를 껴안아 주신 점에서 감사했다.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셨으나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해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듬해 맡은 업무는 부담스러운 학생 생활지도에서 벗어나 방과 후 담당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성향을 이해해 주시고 거기에 맡는 업무로 배정을 해주신 것 같았다. 그 덕에 업무 부담에서 조금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개인의 성향이 강했던 작년 1학년 선생님들 속에서의 생활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조금은 내가 지닌 유머러스한 모습도 보일 수 있어서 한껏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 같았다. 나름 학년 분위기는 더욱 밝고 즐거워져서 많은 학년 모임을 가지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평소 교무실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하였고, 작년에 맡았던 학생들을 고스란히 안고 온 탓에 이해도도 높아 레포 형성이 수월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학년 분위기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가졌다. 무사히 흘러가던 그해 봄. 갑자기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세월호 사건. 수업을 다녀오고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옆 좌석에 앉으신 선생님이 큰일 났다며 뉴스를 보라고 한 것이다.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호들갑을 떠시는 걸까? 하면서 뉴스를 보는데,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한 고등학교 전교생들이 탄 배가 침몰된 것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학교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큰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였다. 하지만 이후 바로 뜨는 속보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구조가 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된 속보에서는 구조된 사람이 몇이 되지 않는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너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수없이 많은 학부모들의 심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 사회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벌써 11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충격이 쉽게 가시지는 않는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비극은 절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아직도 한결같다. 시간이 흘러 또 안전불감증에 빠져 대형 사고가 나지 않길 우리는 늘 주의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교육 현장에서는 많은 혼선이 있었다. 왜냐하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학여행 시기인 5월부터의 수학여행이 국가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였고, 안전에 대한 책임, 그래 그 책임. 그것 때문에 많은 매뉴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그 당시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학교들이 세월호 사건 이후로 있는 1학기 수학여행 일정을 거의 취소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교육 현장에는 이런저런 수학여행 관련 지침서와 매뉴얼들이 공문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조건들이 붙어가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실시되는 수학여행은 우리 학교의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우리 또한 1학기에 예정된 제주도로의 수학여행 일정을 취소하였고, 우선 연기 조치를 하였다. 사회적 애도의 시간을 가지고 많은 안전 점검의 매뉴얼을 따르면서 그해 여름이 지난 시점부터 수학여행은 재개가 된 것으로 기억이 난다.
우리 2학년 담임 선생님들은 그렇게 사회적인 애도에 동참도 하시고, 학생들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하고, 교육에 집중하며 1학기를 마무리하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기간에도 학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한 학생들과의 다양한 사건은 이루 낱낱이 설명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아마 독자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매년 그러한 상황들이 일상인 듯 평범히 흘러간 것 같다. 2학기에 접어들면서 학년 부장 선생님은 우리의 해야 할 일 중에 밀린 수학여행에 대한 일을 재개하였다. 새로운 매뉴얼에서는 절대 특정 인원 이상의 단체가 함께 움직이지 말라는 것. 그리고 반드시 사전답사를 통해 많은 안전 점검을 하라는 것이 중요사항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대다수의 학교에서는 한 학년을 3~4개 팀으로 쪼개어 운영하였고, 교사들이 수학여행 사전답사를 실시하고 안전 점검 결과를 보고하였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총 3개 팀으로 쪼개어 각자의 테마에 맞게 호남지역 일대를 탐방하는 수학여행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각 팀별 대표 선생님을 한 분씩 선정하여 총 3분이 호남지역으로의 사전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내가 있었다. 지금 회상해 보면 재미는 있었지만 그때의 사전답사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출발부터 도착까지 총 20여 시간이라는 하루 꼬박의 시간을 소비하였고, 그 시간 안에 3팀의 일정을 모두 돌아보는 빡빡한 사전답사의 일정 때문에 식사 한번 편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날 운전기사는 나였다는 것이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거의 1000Km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를 운행하였던 것 같다. 아직은 조금 젊은 나이여서 그 운전 시간을 소화하였지만 너무 힘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마 그날 이후 나는 그 어떠한 날에도 운행을 저만큼 해본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아무튼 그 해 수학여행은 별일 없이 잘 해결이 되었다. 아마도 학생들에게는 제주도라는 신비의 섬 대신에 호남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만의 특색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시간을 제공한 듯하다. 또한, 내륙의 다양한 지역에도 볼 것이 많다는 것을 심어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에게도 이후 호남지역의 평안하고 아름다운 여러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그해에는 나에게 또 하나 교사로서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소위 말하는 1정 연수를 받게 된 것이다. 보통 대학에서 교직을 이수하고 졸업하게 되면 2급 정교사 자격이 주어진다. 이후 교직에 몸을 담아 3년간의 생활을 하고 나면 1급 정교사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연수를 받을 기회를 얻는다. 교직 생활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몇 안 되는 자격연수 중의 하나이다. 독자들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에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아직 초보 교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고, 조금 더 심리적인 자율성을 가지며 노력하고자 하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는 것.
둘째, 급여다. 교사의 봉급은 단일 호봉제로서 보통의 공무원 보수와는 조금 다르지만 대략 7급 공무원 봉급에 준하는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 급여가 넉넉하지는 않다. 특히 교직에 막 들어선 초보 교사들에게는 한 호봉 한 호봉의 승급이 의미가 큰 상황이었다. 이러한 우리에게는 1급 정교사 자격을 부여받고 단비와 같이 한 호봉의 승급을 통해 월급의 본봉이 몇 만 원 정도 올라가는 것은 나름 큰 수익이다.
아무튼 나는 그해 여름방학 시점에 신규교사로 임용되어 연수를 받았던 경북 연수원에서 거의 한 달 동안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는 연수원의 담당 교육연구사의 계획하에 짜인 연수 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각 연수별 프로그램의 마지막에는 시험을 치르며, 이러한 최종 점수를 합산하면서 모든 일정이 끝난다. 여기서 연수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연수 점수가 추후 승진 때 반영된다면서 1정을 받는 많은 교사들에게 바짝 긴장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승진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었던 터라 그 긴장감이 별로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험 그 자체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있어서 최선을 다하려고 나름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인 1정 연수의 성적은 별로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집이 경산인 터라 따로 구미에 방을 구하지 않고 기차를 이용한 통학을 하였다. 한 시간이라는 기차 이동시간을 통해 구미역에 도착하면 다시 연수원까지 십여 분간 걸어 다니는 출퇴근을 하였다. 처음에는 기차여행이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빨리 연수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만 가득할 만큼 귀찮고 힘들었던 것 같다. 연수 첫날 수학 1정 연수 대상자들이 하나둘씩 연수원으로 모였다. 대상자들은 다양하였다. 물론,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임용 동기가 다수였다. 오랜만에 보는 임용 동기들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임용에 같이 합격한 대학 후배들도 제법 있었다. 그렇게 반가운 얼굴들을 맞이하면서 함께 1정 연수를 시작하였다. 1정 연수의 기간이 긴 만큼 프로그램도 다양하였다. 그 프로그램 모두가 흡족하진 않았으나, 나름 의미 있고 배울 점이 많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나의 1정 연수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같은 학교에서 함께 수학 교사로 재직 중인 E 선생님이었다. E 선생님은 나의 교직 생활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다.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사이라서 말도 편하게 하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거리감이 좀 있었던 교사였다. 1정 연수 기간 함께 옆자리에 앉으면서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간의 교직에 대한 생각도 공유하였던 것 같다. 잠시 E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E 선생님은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임용에 합격하였다. 그 우여곡절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생략하겠다. 함께 임용이 되고 신규 연수가 있었던 그 시기를 어렴풋이 더듬어 보면, 그 당시 키가 크고 깡마른 가무잡잡한 한 선생님이 쉬는 시간마다 흡연 장소에서 혼자 고독히 담배만 연신 피워대던 모습이 인상에 가장 남는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없었으며, 연수가 끝나기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그 선생님을 보면서 참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가끔은 연수가 끝나고 동기들이라고 같이 모여서 가볍게 맥주도 한잔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그때 그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러서야 E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경남의 한 학교에서 기간제 생활을 병행하면서 임용시험을 쳤고, 그렇게 임용에 합격한 이후 기간제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전이라 연수는 참석하였으나 또 곧바로 근무 중인 학교로 출근해서 일을 처리해야 되는 상황이어서 그랬다고. 그렇게 신규 임용 연수가 끝나고는 2년 동안 서로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느라 만나지 못했으나 구미 인문계고로 옮겨오면서 같은 학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원래는 구미 한 중학교에서 신규 생활을 1년 하고 바로 이 학교로 옮겨 왔던 것이었다. 첫해는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하고, 바로 이듬해부터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이미 내가 이 학교로 부임받을 때는 고3 담임을 시작하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1학년, 2학년 담임을 순차적으로 하는 동안 벌써 E 선생님은 고3 담임 2년 차였던 것이다. 1정 연수 기간은 사실 고3 학생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여름방학을 보내는 시간이었는데, 이때 그 선생님은 연수가 끝나면 매일 같이 무보수로 학생들에게 수능 완성이라는 EBS 교재로 특강 수업을 해주기 위해 다시 학교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수업을 위해 1정 연수 기간 내내 시간을 내어서 교재연구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열정을 내면서 아이들을 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그 시기에 나는 교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어느 정도의 열정도 식었고, 조금씩 싫증도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와 동갑이면서 임용의 시작도 나와 같았으나 학생들에 대한 교과 지도뿐만 아니라 생활지도 및 대입 지도에 대해서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솔직히 나 자신에게 조금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느꼈다. 아무튼 E 선생님과의 1달간의 조우는 나름 나의 생각과 교직에 대한 여러 생각의 변화를 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늘 자신감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교직이 재미가 있다는 교직 4년 차의 E 선생님과 자신감 결여에 열정은 조금씩 바닥을 치고, 교직에 회의감이 드는 교직 4년 차인 나. 게다가 동갑이라는 그 사실까지. 너무 대비되었지만 거기서 조금씩 나도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야겠다는 목표 의식이 조금은 들었던 것 같다.
나의 그해 여름 1정 연수 기간은 날씨만큼 나의 감정도 많이 뜨거웠던 것 같다. 그렇게 무사히 1정 연수를 마치고 2학년 담임으로서 학교로 잘 복귀하였다. 내가 보낸 여름방학 중 가장 길고 힘들었던 방학 기간이었다. 학교는 여전히 똑같은 굴레 속에서 돌아갔다. 선생님들은 사고 치는 아이들, 칭찬하고 싶은 아이들, 소소한 감정 소모를 해야 하는 아이들과의 생활을 함께하면서. 학교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사회였고 그 속에서 담임 선생님들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 해는 큰 몇몇 일들을 보내면서 한 해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그 당시 2학년 담임 선생님들 간의 사이가 좋아서 나름 소소하게 시험 기간에 인근 지역으로 작은 여행도 떠나고 함께 식사도 하고 많이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경산에서 출퇴근해야 하는 나는 대구 칠곡에 사시는 몇몇 선생님들과 카풀을 하면서 늘 공감도 하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낸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이후 2학년 담임 선생님들과 계모임을 만들어 한동안 학년이 끝나고도 모임을 가졌으나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러 잘 보지 못하고 있다. 그때의 나의 2학년 담임 생활은 선생님들의 좋은 모습이 가장 인상에 남는 한 해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