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미 인문계 고등학교(3) >
구미 인문계고에서의 3년 차에 접어드는 해가 시작될 때쯤, 나와 함께 1, 2학년을 해오신 부장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고3 담임을 할 생각이 있어요?”라고. 나는 교직 4년 동안 고1, 2 담임만 해오고 있어서 조금 지루한 나의 교직 생활에서 변화를 줄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학생부 종합전형이라는 수시 전형이 광풍을 불던 시기라 이제는 조금 학생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생활기록부 기재의 방향성을 알기 위해서라도 고3 담임을 하면서 입시지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의욕도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부장 선생님께 “고3 담임을 하면서 이래저래 입시에 대해 배우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라고 말하였고, 그해 고3 부장 선생님을 하게 될 분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여 자연스럽게 고3 담임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옆자리는 벌써 고3 담임 3년 차에 접어드는 E 선생님이었다. 동갑이고 임용 동기였지만 이미 고3 담임 경력이 나보다 많아서 사실 부럽기도 했고, 그 앞에서 잘 몰라하는 모습을 보일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할 것 같은 나의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처음 고3 담임의 시작은 문과반 학생의 담임으로 시작하였다. 담임으로서의 역할은 같았다. 아침에 조례를 실시하면서 지각생들을 단속하고, 하루에 대한 파이팅을 불어넣어 주었다. 간혹 지저분한 교실을 정리도 하였고, 아이들과 함께 청소도 하였다. 그러고는 야간자율학습 전까지는 학생들에게 고3이라는 의무감을 심어주면서 학습에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워 주기도 하였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수능 공부와 내신 공부를 병행하여 자신이 선택하게 될 대학들에 대한 제약조건을 없앨 수 있도록 아낌없는 조언도 하였다. 하지만 이내 현실적 벽을 느꼈다. 3월 초 학생들 개인 상담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1, 2학년 담임 시절에는 3월 초 학생 개인 상담이 그냥 개인사나 고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잘해보자고 다짐하는 시간이라면,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은 사실상 구체적인 입시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입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에 해줄 말이 없었고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입시상담은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교사라면 1년 내내 시시때때로 아무 때나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인지라 이제는 대입 제도에 대해 꼼꼼하게 공부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3월 초 상담에서 솔직히 아이들에게 나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선생님도 올해 고3 담임이 처음이라 아직 입시에 대하여 공부해야 한단다. 그러니 함께 공부하면서 더 정확히 알아보고 원서 접수 기간에는 반드시 후회 없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도록 하겠다!”라고.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처음 입시를 시작하는 담임에 대한 불만이 없을지 늘 노심초사였다. 난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하여 책임지기 위해 훌륭하진 않아도 최소한 피해는 끼치지 않을 만큼 입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렇게 3월 한 달은 입시 공부에 매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막막하였던 나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E 선생님이었다. 업무에 대한 대처 방식이 나와 정반대의 성격인지라 그 선생님은 첫해부터 막힘없이 학생 지도에 열정을 쏟았고, 그렇게 쌓인 2년간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입시지도에 대한 노하우를 많이 쌓은 듯했다. 나는 E 선생님께 내가 모르는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차근히 물어보고 그것을 나만의 파일로 정리하면서 복기하고 꾸준히 공부하였다. 내가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았지만 E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과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관점으로 최대한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이러한 영향력 덕에 대학 입시에 관한 객관적인 입장과 시야를 가지게 된듯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늘 처음 배운 그 관점을 토대로 조심스럽지만 조금 더 정확한 시야로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면서 현재까지 달려온 것 같다.
그렇게 나는 1년간 E 선생님 옆에서 많은 조언과 도움 덕에 3학년 우리 반 학생들의 입시지도를 무사히 마쳤다. 물론 나의 지도가 부족한 부분도 많았고, 첫해에 스펙트럼이 다양한 아이들을 전문대부터 서울 상위권 대학까지 모두 지도하기엔 많이 힘들었지만 그 경험이 나에겐 후에 큰 자산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내가 훌륭한 입시지도 선생님으로 거듭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잘못된 관점으로 아이들을 현혹시키거나 최소한 잘못된 정보만큼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는 있다. 나의 입시지도에 대한 관점은 최소한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조심스럽게 지도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변화에 늘 맞춰 나가기 위해 꾸준히 주시하고 있다.
그 해 고3 담임을 하면서 나름 성취감을 겪은 경험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다양한 입시 제도 속에서 논술전형이라는 수시 전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E 선생님이 논술전형에 적합한 아이를 선정하여 지도를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때마침 E 선생님과 학년 부장 선생님 사이에 교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과 논술전형의 대표적인 과목인 수학 과목에 대해 관심이 많으면서 내신 성적은 다소 떨어지는 몇몇 학생들이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대한 의지가 뚜렷해서 논술전형에 대한 지도를 맡을 선생님이 필요한 터였다. 나는 처음 하는 고3 담임으로서의 입시지도에 상당히 혼란이 많아 힘들어했지만, 나름 입시에 대해 자신감이 차 있던 E 선생님을 믿고 따라 함께 하기로 하였다. 그해 봄에서 여름에 걸치는 시기에는 주말에도 자습 감독 등의 여러 이유로 매일 같이 출근하면서 E 선생님과 함께 각자가 맡은 수학 분야에서 나름 학생들에게 맞는 논술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와서 보기엔 많이 허접한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교재를 만들었다. 그리고 십여 명 정도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리 논술전형 반을 꾸려 우리가 만든 교재를 기본서로 학생들에게 조금은 고등의 수학을 지도하면서 함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사실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책을 만들고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도 많았다. 특히, 논술전형 지도라고 특별히 수당을 더 받거나 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E 선생님과 함께 자비를 털어 학생들 책을 마련하여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돈을 떠나서 함께하면서 같이 잘 따라주는 학생들이 기특했고, 그 해에 십여 명 중에서 3~4명이 논술전형을 통해 성공 사례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논술전형과 관련된 고액의 학원 수업이나 고액의 과외수업이 판쳤던 터라 공교육에서 잠시나마 그러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나의 기억 속에는 아주 좋은 경험이면서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그때의 열정이 앞으로의 나의 교직 생활에서도 식지 않고 발현되는 좋은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시기를 함께 했던 E 선생님과의 유대관계가 그 시점을 계기로 많이 돈독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고3 담임의 시절을 나름 열의를 다해 보낸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감사한 한 해였던 것 같다.
나의 고3 담임 생활 동안 선생님들과의 1년은 전년도 2학년 담임 선생님들과의 1년만큼 즐거웠다. 우리 부장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셨지만 나름 카리스마로 젊은 선생님들을 잘 이끌어 주셨고, 때론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아침을 챙겨 먹이시려 일찍부터 동네 맛집이라는 김밥 가게에서 김밥을 사 와 함께 나눠 먹기도 하였다. 때론 카리스마로, 때론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우리를 잘 이끌어 오셨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함께 회식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즐거운 1년을 보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날의 학년 회식 날이었다. 구미에서 조금 떨어진 대구 칠곡에서(사실 대구 칠곡은 부장 선생님 집이 있는 곳이었다.) 하루는 회식을 가지게 되었다.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개인적인 사정에서 몇몇 선생님들이 뒤늦게 합류하였는데 그중에 한 명이 E 선생님이었다. 나는 특유의 장난기를 발동하면서 늦게 온 선생님들이 더 술을 많이 마셔야 한다면서 가득 담아주고 분위기를 몰아가며 늦게 오신 선생님들께 많은 술을 권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결국 많은 선생님들이 기분 좋게 취하고 많이 웃으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 나와 그 E 선생님은 결국 술에 너무 많이 취해서 실려 갔던 기억이 있다. ^^;; 하지만 우리는 가끔 둘이 만나면 그날의 회식을 곱씹어 보면서 웃곤 한다. 가끔은 과음으로 실수도 할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실수면 좋은 추억이 되지 않냐면서 스스로 자기 합리화도 해보면서 말이다.
나는 3학년 담임을 하면서 전년도에 이어 3학년 담임을 하는 몇몇 선생님을 보면서 부러울 때가 몇 번 있었다.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3학년 졸업을 하고 이듬해 스승의 날이라고 찾아오는 제자들이었다. 보통은 마지막 정이 아이들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지 대다수의 학생들은 특별한 기억이 있는 선생님이 아니고는 고3 담임 선생님을 이듬해에 찾아오곤 한다. 그렇게 찾아온 아이들은 소소하지만 음료수 몇 병을 건네며, 고등학교 시절 보이지 못한 여유와 넉넉한 웃음으로 은사님과의 대화를 나누다 간다. 나는 그 모습들이 왜 그렇게 부러운 지 아직 5년 차의 나에겐 그냥 부럽고 부러웠다. 아마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라 더욱 그럴 것이고, 그렇게 찾아오는 제자들을 통해 선생님이라는 존재의 이유를 느끼며, 지난 교직 생활을 보상받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한 번쯤은 경험하고 싶은 그 상황이 그렇게 너무 부러웠다. 아마 이러한 생각이 드는 저변에 깔린 그 이유는 첫 부임된 학교에서 이루지 못한 아쉬움의 연장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이유에서인지 나도 이제 이듬해가 되면 졸업생이 적어도 한두 명 정도는 와서 인사를 나누고 담소를 나누지 않을까 기대도 하며 아이들을 지도하였다. 그렇게 1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나에게 고민이 하나 생기기 시작하였다. 내가 거주하는 경산이라는 지역으로 학교를 옮기고자 하는 나의 갈망과 더불어 때마침 어느 고등학교에 초빙 자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주변 선생님들은 당연히 가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마음 한편에는 올해 졸업시키는 제자들을 이 학교에서 내년에 꼭 맞이하고자 하는 나의 욕심이 상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교직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해온 지금의 나로서는 그게 무엇이라고 그렇게까지 고민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한참을 고민하던 중에 나의 고민을 E 선생님께 털어놓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기가 있었다. 그때 E 선생님은 아이들이 찾아오는 것은 좋겠지만 사실 한순간이라고, 다른 학교에 가서 그런 제자들을 경험하면 되고 우선은 장거리 출퇴근이 힘드니 경산으로 가는 것이 맞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대화가 나에게는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안고 나는 초빙 자리에 신청하였고, 결국 구미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학교를 떠나면서 졸업시키는 제자들을 이제는 사실상 못 보게 된다는 아쉬움도 있었고, E 선생님과의 교류가 이렇게 끝난다는 아쉬움도 공존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만날 사람은 언젠가 다시 또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란 기대감으로 그렇게 아쉬운 감정들을 잘 추스르고 나의 고향 경산에서 3번째 학교에서의 교직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