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속초순보기 Feb 13. 2023

손주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찢어지듯 커다랗게 입을 벌린 채, 얼굴 근육에 힘을 주며  거실로 나가다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네 개의 눈을 보고,  주춤했다.


 잠들기 전  내일은 돌봄 교실을 가지 않아도 되니  저절로 잠이 깰 때 일어나도 좋다고 말했건만  불도 켜지 않은 채 , 만화영화를 보고 있다가 두 녀석이 동시에 쳐다 보고 있는 것이다.


" 저 녀석들은 늦잠을 자도 되는데, 벌써 깬 거야?"  얼굴에 저절로 떠오른 당황함을 감추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아이들은 우스꽝스러운 토끼의 퍼포먼스에 소리 내어 웃으며  다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참 이상도 하지... 아이들은 왜 노는 날이면 더 일찍 일어날까..."


내 자식 키을 때도 일요일만 되면 일찍 일어나, 문 앞에 서있는 모습에 놀란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베개까지 집어던지며 일어나기 싫다던 손주도 주말만 되면 제 부모보다 더 일찍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딸은 좀 쉬자며 짜증을 낸다.


이 모습 익숙하지 않은가. ㅎㅎ " 그래 너도 어릴 때  그랬거든!!"


매주 금요일은 손자와 손녀가 학교 돌봄을 가지 않고,  11시까지 태권도 학원으로 간다.  온갖 야채와 햄, 김을 넣고 주먹밥을 해 먹고, 10시 40분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같은 만화영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면서도 저렇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느긋하게 책상에 앉아  블로그 작성을 하고 있었다.   


잠시  거실에서 TV 끄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할머니!! 지금 태권도 학원가야 한단 말이에요!!"


시간은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태권도 학원은 11시까지 아니야? "


"사부님이 재미있는 게임 한다고 10시까지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금방이라도 학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목소리에는, 학원가는 시간도 몰랐냐는 힐난도 들어 있었다.


" 그럼 일찍 가야 한다고 할머니한테 말했어야지, 할머니 이거 다하려면 15분은 걸리는데, 좀 기다려!!  "


" 아니, 할머니는 내가 지난주에도  빨리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가야 한다 말이에요"  한심 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대로 블로그 글이 써지지 않아 안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무시하는 듯한  손주의 태도에  비위가 거슬리며 왈칵 짜증이 났다.


 " 이 자식이!! 할머니가 기억을 못 하면, 다시 말했어야지, 지금 까지 TV 보다가 왜 할머니한테 큰소리야!!"  잔소리를 퍼부었다.




학원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컴퓨터를 켜놓은 채,  아이들을 앞장 세우고 따라나섰다.


학원에 늦게 가게 된 원인이 할머니에게 있다는 듯이 내내 쿵쿵 땅이 꺼지라 발로 차며 걸었고, 그 소리는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쩍슬쩍 곁눈질로 눈치만 살피며,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서로 눈이 마주쳐도 모른 체 걸었다.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아이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짐짓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아이도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관심을 지워 버린 듯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방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아이가 보란 듯이 더 크게 행동하면서 말이다.


" 할머니!! 저 갈 때까지 안 가실 거죠?"


학교 잘 다녀왔어? 재미있었어? 잘 놀다 왔어? 힘들었지? 먹고 싶은 간식 있으면 말해봐? 사과 깎아줄까?... 어떤 말을 건네도 답을 하는 법이 없는 녀석이 말을 건넸다.


먼저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말을 먼저 건네는 법이 없는 녀석이 말이다. 


그다음은 새삼 말할 필요로 없다. 짜증도, 서운함도, 기싸움도 다 사라지고, 아이옆으로 다가갔다.


 " 그럼 ~ 그리고, 아까는 미안해, 할머니가 들어도 기억을 잘못해, 이젠부터 메모장에 기록해 둘께. 그래도 할머니가 잊어버리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줄래?"


" 네...." 대답도 짧다. 그래도 어쩌랴.  


 아이와의 대화가 많아지려나..이제 아이와 가까워 지는 물꼬 터진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학원을 보냈다. 


 속초로 향하는 발걸음이 상쾌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인생 60에 떠난 서울여행 4개월 차 소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