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입탄리이다. 산골 중 산골이다. 워낙 두메산골이다 보니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끝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만큼 두메산골이라는 이야기이다.
평창 입탄리를 가려고 생각만 해도 나는 눈물부터 나온다. 가슴이 아프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젊은 시절 너무 고생을 한 탓인가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자동차가 평창 읍내를 지나 입탄리로 들어가는 입구 약수리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점점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빠진다.
멀리서 입탄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보인다. 마음은 그리움을 넘어 우울해지는데, 가을바람은 왜 이리 맑고 시원한지 모르겠다. 자동차가 약수리를 지나 고개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약수리에서 입탄리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를 넘어야 하는데, 재의 이름은 노래재이다.
재를 넘는 일이 너무 힘이 들어서 노래라도 부리지 않으면 넘지 못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자동차가 힘들지 않게 올라간다.
노래재라는 표지석이 보이자, 멋 옛날 처음 남편을 만나 이 고개를 넘던 날과 아이를 둘러업고 넘던 날이 생각났다.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도로 폭 양쪽에는 우거진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작은 돌이 깔려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누군가가 내 옷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산속 고갯길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무섭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면 나뭇가지에 옷이 걸린 거였다.
앞장서서 걷는 남편에게 " 언제 도착해? " " 거의 다 왔어". 똑같은 질문을 4번이나 했는데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날이 저물어 갈수록 조바심은 나고, 산골 길은 급속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걸었나 싶었는데, 정상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도착했어?를 묻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물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재 정상에서 남편은 고개의 유래를 알려주었다.
잠시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구비 돌으면 다시 한구비가 나오고 2번을 더 돈 후에야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 저 집이야?" " 아니!, 저 집 있는 곳이 고개를 다 넘었다는 거야" " 그럼, 얼마나 더 가야 해? " "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아니, 여기서 더 얼마를 가야 한다는 거야.. 되돌아 나갈 수도 없고..
날은 어두워져 아예 캄캄해졌다. 울퉁불퉁한 길은 균형을 잃게 했다. 아무도 없는 산골길에 바람소리와 이따금씩 새우는 소리만 들렸다.
바람소리에 놀라서 바싹 남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기를 20분 정도 지나자 동네가 나타났다.
이제 도착했나 보다 생각하고 어느 집이냐고 물었더니, 더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어이쿠야!! 아직도 더 가야 한다니....
이미 저녁시간은 늦어 마을 집들은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모두 방으로 들어갔는지 집집의 방문에서는 불빛만 새어 나왔다.
부지런히 걷던 남편이 잠시 서더니 뒤따라 오는 나에게 학교를 가리키며 자기가 다니던 초등학교라고 알려 주었다. 너무 깜깜하여 학교가 큰지 작은지 분간도 가지 않았지만 남편이 다녔다는 학교라고 생각하니, 반갑고 교정에서 남편이 뛰어노는 모습이 떠올랐다.
입탄초등학교를 지나 한고비를 돌아서 올라서자 두 채의 집이 보였다. 도착했냐는 몇 번의 물음에 다 왔다는 대답만 했던 터라 집이 보여도 묻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정말 도착했다고 한다.
도착하고 발을 보니 발은 다 까져 상처가 났고, 구두도 상처 투성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구두를 신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첫째 아이가 한여름에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울어 젖히더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니 뜨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밭에 일하러 나가진 시부모님은 점심이래야 돌아오시는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고, 아이를 업고 마당만 서성거렸다.
아이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산골에는 병원이 있을 턱이 없고, 아이를 위해 비상약을 준비해 두지도 않았는데 큰일이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재를 넘어가야 하는데, 어떡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오신 부모님에게 말씀드리니, 어른 해열제를 반으로 갈라 물에 개어 먹이라며 어른용 해열제를 찾아 주었다.
어른용 해열제를 먹어도 괜찮은지 어쩐지 몰라 약을 받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자식 키울 때 다 그렇게 먹였다며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먹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전히 판단이 서질 않았고, 어른용 약을 먹였다가 아이가 정신이 나가는 거 아닌지 하는 불안감만 커졌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다시 밭으로 나가셨다. 나는 아이를 들쳐 없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른용 해열제를 먹일 수는 없고 병원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에서 아이는 침을 흘리고, 몸은 뜨겁고, 점점 쳐지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산골 길을 달리고 달리고, 재를 넘어 약수리로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아이는 점점 쳐져 늘어지는데, 왜 버스는 안 오는지.. 버스가 오면 세우리라 맘을 먹고 읍내로 걷기 시작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며 버스가 제발 와주길 바라면서 뛰다시피 걸었다. 버스는 동네를 벗어날 때쯤 되서와 왔고, 읍내에 도착하여 병원으로 냅다 뛰어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를 이지경이 되도록 뭐 했냐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 아이가 열이 나는데, 이렇게 싸매면 어쩌냐며 옷을 다 벗겼고, 아이에게 주사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아이에게 주사를 맞히고, 다시 둘러 업고 읍내 버스정류장으로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칭얼대던 아이는 등에서 잠이 들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슨 정신으로 읍내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더군다나 애와 단둘이 그 고개를 넘어 걸어 들어가야 한다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친정으로 아이를 업고 갈까?" " 안되지, 아버지가 졸업하자마자 남편 따라갔다며 동네 창피하다고 3년 동안 집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윙윙거렸다. 밭에 나간 부모님은 내가 없어진 줄 알면 걱정하실 텐데.....
아이를 업고 노래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무서웠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골길..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지... 이러다 못된 사람 만나면 어쩌지..."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노래재 중턱까지 올라오자 여태 잠을 자던 아이가 깨어나서 옹알이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옹알이를 듣는 순간 무섭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아이가 살았구나, 다행이다 싶은 생각에 너무 감격해서 아이를 등에서 잠시 내려 안았다.
아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얼굴엔 환한 달빛이 비쳤다.
옹알이하는 아이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걸으니 조금은 무서움이 사라졌고, 어서 집에 들어가 아이를 편안히 눕혀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아픈 아이를 업고 얼마나 뛰었는지, 발은 상처 투성이었다.
오늘 노래재를 오르면서 생각난 옛 추억이다. 고개를 넘는 내내 옛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젊은 날 20대!! 이 고개를 참 많이도 넘었다. 어떤 날은 이웃집 경운기를 타고, 또 어떤 날은 발이 다 까지기도 하면서...
고개를 넘는 내내 그때의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그때가 참 행복했다.
재잘거리던 아이도 있었고, 한겨울 밤을 보냈던 부모님도 계셨고,
시누이 초등학교 운동회에 온 식구가 출동했던 일도 있었고, 하루에 한 번 지나가는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던 일 등등 나의 20대 젊은 날의 추억이 고개 너머에 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