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마을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는 20여 분, 백담사 까지는 걸어가든지 셔틀버스를 이용해야만 한다. 걸어가려면 1시간 40분 정도, 버스로는 20분, 길은 곡예를 떠올리듯 아슬아슬하다. 운전하시는 기사분의 능숙한 솜씨를 믿는다고 해도 불안한 마음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굽이 길에서는 와~~ 와 ~~ 하는 소리가 버스 안을 가득 메운다. 백담사를 처음 와본다는 승객은 굽이길에서 아찔했는지 비명소리를 냈고, 그 비명소리가 너무 커서 기사님이 놀란 나머지 운전대라도 놓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몇 굽이를 돌고, 마주 오는 같은 버스를 2번 정도 비껴간 후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묘기를 부리듯 아슬아슬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와야 인제 백담사다. 그만큼 인제 백담사는 내설악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어떻게 찾아왔을까 궁금해진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44번 국도 백담사 입구에서 내려 백담사까지 걸어 올라오면서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걷는데도 사방으로 경계의 눈빛을 보냈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어머니는 무서운 짐승이 나올 수도 있는 이 깊은 산중의 사찰을 왜 찾아왔을까... 시집살이 한탄을 위해 친정으로는 가지 못하고, 백담계곡의 흐르는 물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버리기 위해 서였을까. 어머니는 이산가족으로 가족들 모두 북한에 있어, 할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도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그 감내라는 것이 뒤란의 고방 들어가서 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 백담사를 방문하기 시작했고, 뒤란 고방에서 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때가 한계령이 뚫리고 난 이후였지 싶다.
신라시대 창건된 백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뒤로는 설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졌고, 앞으로는 백담계곡이 흐른다. 내설악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백담사는 포근한 느낌이 들고, 경내에는 극락보전, 산령각, 화엄실, 법회실, 정문, 조사 채, 나한전, 삼층석탑 등이 있다.
수심교를 지나면 백담사를 바로 마주 할 수 있다. 백담사는 진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하여 한계사라 한 이후 운흥사, 심원사, 영축사를 거처 백담사로 이어지며,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에서부터 이 절이 있는 곳까지 담(웅덩이)이 100개가 있어 백담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백담사의 대문 역할을 하는 금강문을 지나려니 겁부터 난다. 절에는 6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낙산사를 방문했었다. 그때 사천왕상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며칠 몇 밤을 지나도 그 눈초리를 잊지 못했고 여전히 우물쭈물한다.
백담사는 언제 와도 고즈넉하고, 한가하다. 바람도 한가하게 분다. 극락보전 앞 3층 석탑은 모서리가 깨져 있어 그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고,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고 단출하게 보이는 백담사이다.
백담사 경내의 모든 전각들이 단출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설악산 깊숙이 숨어있듯 자리 잡은 백담사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인제 백담사 하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분이 있는데 만해 한용운 선사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님의 침묵 외 많은 시와 글을 쓴 문학가이며,일제 침략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이러한 그의 업적과 불교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념관이 함께 있다.
경내와 만해기념관을 살펴보고 찻집으로 들어갔다.
수심교가 바라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이리 좋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도 좋고, 하늘도 맑고, 종교는 없지만 분위기에서 부처님의 자비도 느껴지고.
음료를 마시며 창밖을 한참이나 내다보고 있는데, 배낭하나만 메고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배낭 하나만 메었고, 일행이 없으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마음이 쓰이고 달려가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동병상련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싶다.
달랑 배낭 하나에 생수 한 통을 넣고, 목적지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곳으로 발길을 내딛고 홀로 여행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어 가고 있다.
지하철 광고, 인터넷, 뉴스 등에서 거론되는 곳을 목적지로 삼아도 매일매일 갈 곳은 한없이 많았다. 다만 출발지를 서울로 정해둔채.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엇을 얻었나..
퇴직 후의 무엇을 해야 할까, 평생 시키는 일만 해 왔기에,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다짐하고 여행을 시작했지만, 아직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가치 있는 일인지 알아낸 것 없이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누구는 산티아고길에서, 누구는 동해안을 따라 서해안까지 걸으면서 그 깨달음을 얻었다는데... 산티아고길이던 동해안 국도든 다 걷는 것인데, 도심지를 걷는다고 무엇이 다를 것이야.. 하며 도심 속을 걸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찾지는 못했어도 두려움 없이 길을 나설 수 있다는 것.
내설악의 깊은 산중 백담사 계곡에는 수만 개의 돌탑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돌탑의 높이는 모두 다른데, 돌탑을 쌓은 사람들의 바라고자 하는 크기에 따라 돌탑의 높이도 달라지는 것 같다.
사람들의 소원으로 채워진 돌탑은 웬만해선 넘어지지 않고, 큰 물이 날 때만 쓸려 내려간다. 그 쓸려 내려간 자리에 돌탑은 다시 쌓아진다. 새로운 돌탑에는 이전과 같은 소원들이 쌓인다.
계곡에 큰 물이 지나고 나면 돌탑은 모두 사라지지만, 어느샌가 다시 쌓이며 끊임없이 무한 반복 한다. 먼 옛날 사람이 그랬고 지금 우리가 그랬듯이 미래에도 돌탑은 쌓아질것을안다.
백담계곡의 나뭇잎의 푸르름은 서서히 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이내 설악산 대청봉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백 개의 담을 차례로 거쳐 백담사에도 단풍이 든다.
"눈꽃 날리자 눈앞은 모두 흰 데 쌍폭은 산허리에 걸려 있네 봉래산과 백중지간이라 한 말 물로 흉금을 씻어주네
가고 오락, 이유원 (1814~1888)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문을 거치지 않고 백담사로 향한다. 일주문에서 들어가면 양옆으로 이곳이 백담계곡이다 할 만큼 큰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햇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스름한 길에는 옛 선비들이 백담계곡을 노래한 시가 있다.
백담계곡이 예나 지금이나 한 경치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 깊은 설악산 자락까지 어찌 왔는지, 그것이더 궁금하니 깨달음은 아직 멀고 멀다.
셔틀버스는 마을로 내려갈 때가 백담사로 올 때보다 더 아슬아슬하다. 곡예에 가깝다. ,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서는 땀이 흥건하지만 버스기사분은 능숙하게 승객을 종착점에 내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