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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초순보기 Oct 03. 2023

어머니가 가는 길을 나도 가고 있다.


성묘를 가는 날 비가 내렸고,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렸다.


자동차는 이리저리 쏠리면서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고 , 차의 움직임 따라 이리저리 몸이 쏠리며 ' 아구구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끼익 ~~ 자동차도 힘든지 오르는 내내 가쁜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동차도 힘든 이 길을 40년 전엔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넓지도 않은 산속 오솔길은 경운기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고, 길 양옆으로는 칡덩굴이 서로 얽히고, 나무가 터널을 만들고, 수풀사이에는 사람이 들어오는 공간을 절대 내어 줄 수 없다는 듯 , 서로 엉킨 숲은  이내 깜깜해지고, 고요해지면서 산짐승 우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적막한 순간에 사람을 만나면 이 길은 더욱 무서워졌다.


처음 남편을 따라 들어올 때  이 길은 낭만가도였다. 나무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무연고 무덤에서는 더욱 가까워지고, 오솔길에서는 손이 스칠 듯 말 듯  로맨틱 가도였다.


숲이 무성한 길 끝에는  산에서 굴러 내려온 크기와 형태가 다른 자연석들이 나 뒹굴고, 움푹 파인 크고 작은 웅덩이가 발길 더디게 하였다. 그런 길에 뽀얀 얼굴을 한 새색시 마냥 듬성등성 황톳길이 나타나기도 한 이길은 내겐 늘 뽀얀 황톳길인 낭만가도였다.




숲이 우거지고 자갈돌 일색인 낭만가도에 집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골짜기를 한참을 따라 들어가고서야 집 한 채가 나타나고는 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골짜기뿐, 아무리 목을 길게 빼도 역시 골짜기 골짜기... 그 골짜기 사이로 하늘만큼은 맑았고, 각자 울음으로 우는 새들의 지저귐이 계곡을 메웠다.


이곳이 한국전쟁당시에도 전쟁이 나서도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두메산골, 내 남편의 고향이다.








버스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고, 걸어서 야만이 들어올 수 이 길에 택시는 당시 서울 가는 요금만큼 지불해야 들어왔다. 그것도 사정사정을 해야 했고, 몇 푼이라도 더 쥐어줘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나를 보기 위해 사정사정해서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가. 사정없는 말 한마디 없이  다시 사정사정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가셨다.




깊은 산중 로맨틱 가도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온 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1주일 후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딱 두 가지


어머니의 말 씀 " 지 눈 지가 찔러 고생하는데,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말라'

아버지의 말씀 " 동네 창피하니까 절대 집에 발 들이지 말라 "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콩깍지가 끼여 황홀경 상태였으므로 신경쓰지 않았고, 당연하게 이어지는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 늘 걸렸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하면서 어떤 설명도, 이해도, 미움까지도 말하지 않았다. 큰딸에게 걸었던 희망에 대한 배신의 이야기도 일언반구 없었다. 손녀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였고, 왜 그런 모진 말을 했는지 일언의 설명도 핑계도 없었다.



맏며느리로, 대접도 못 받고, 8남매를 키우면서 고생고생하는 엄마가 안타까워

' 엄마는 왜 그러고 살아!!"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말이었다고, 내 맘대로 결론을 냈는데, 그 이유는 나의 생애 역시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생애가 내 생애와 같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듯 앞만 보고 살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저 평가받지 않기 위해 , 늦은 출발의 직장생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몰래 지침을 더 읽기도 하였고, 무엇하나라도 놓치기 않기 위해 욕심을 부려서까지 얻으려고 하였다.


아들 아들 하는 가문의 큰딸로서 자식을 위한 일보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을 우선시하고, 딸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하여 멋진 여성으로 명성을 얻겠다는 의지와 다짐은 자식 앞에서는 무너졌다.


가족이 우선이라는 핑계를 자신에게 대었는지는 나 자신도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자식을  위해 평생을 사신 어머니의 생애와 다르지 않았음을 지금에 와서야 인정한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생애를 닮지 않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인생과 빼다 박은 그 길을 가겠다고 하자, 절박한 심정을 담아 혹독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뿐 어머니의 그 말의 의미는 여전히 알 길이 없다.





깊은 산중의 자갈밭 낭만가도 위에서 태어난 딸은

어느 날 신세 한탄을 하는 나에게 " 엄마 맘대로 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결혼은 하기는 쉬워도 무르는 것은 더 어렵다'  ' 자식이 생기고, 살다 보면 그것이 마음대로 된다던? ' 하고 어머니가 나에게 한 말씀처럼 나도 딸에게 똑 같이 말했다.


어찌 이리도 내가 어머니에게 한말을, 딸이 똑 같이 하며, 또 돌려 주는 것일까.


얄똥미운 딸도 자기 딸에게 같은 말을 들을지도 모르고, 돌려 줄지도 모른다.  엄마의 길은 경험을 통해서 이미 증명하였고,   '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 했던 어머니의 말씀처럼 내가 걸어온 길도 어머니와의 별반 다르지 않고, 어머니가 가신 길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길 이다.


40년전 넘던 고갯길은 경사는 완만해졌고, 포장이 되어 있다.  하지만 굽이를 돌때,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걸어 자동차를 자제를 시키지 않으면 롤러 코스터가 궤도를 벗어나듯 위험 천만한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갯길을 넘는 수단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험한 고갯길이다.  



이 험한 길에서 자신을 닮은 삶을 살아야 했던 딸을 보던 어머니의 그 슬픔과 아픔은 여전히 이 고갯길을 넘지 못하고 맴돌고  나는 환청같이 그말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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