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멈춰 선 철도 위에 남아 있다.
추석 어머니를 기리며
아들과 딸이 고르게 태어난 집안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막내딸.
큰오빠가 철도 기관사로 집을 비우면 부모 곁에서 재롱을 부리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던, 가족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든든한 오빠 셋, 다정한 언니 둘. 그들 모두의 손길과 눈길 속에서 자란 귀한 막내딸이다.
어머니가 열 살 무렵 큰오빠는 철도 기관사로 임명되어 원산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부터 형제들은 자연스레 큰오빠가 몰던 기차에 올라 양양과 원산을 오갔다.
농사와 어업이 생계의 전부였던 시절, 철도 기관사는 마을의 부러움을 사는 귀한 직업이었다. 가족이 기차를 무료로 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특권이었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남들이 쉽게 누리지 못하던 세상을 경험했다.
금강산 온정리로의 온천 여행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온천 여행은 좀 있는 집들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으나, 큰오빠 덕분에 어머니는 그 귀한 온천을 자주 즐길며 그곳으로 소풍을 갔다.
어머니의 유년은 늘 기차의 기적소리로 시작된다. 양양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기차, 창밖으로 스치던 산과 바다의 풍경은 유년의 설렘과 가족의 즐거움이었다. 금강산 온정리의 온천은 겨울에도 따듯한 숨결처럼 몸을 감싸주었고, 명사십리 해변의 모래는 발끝에서 반짝이며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장 밝아지던 순간은 큰오빠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양양-원산 간 철도 기관차를 힘차게 몰던 오빠의 모습은 어린 동생에게 영웅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모든 추억은 과 기억은 6.25 전쟁이라는 광풍 앞에서 멈춰 섰다. 기차는 더 이상 달리지 못했고, 산과 바다는 국경이 되었다. 금강산의 온천도, 명사십리의 모래밭도, 오빠의 환한 얼굴도 하루아침에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분단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진 어머니는 늘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형제들을 그리워했다. 명절이면 빈자리를 헤아리며 눈물을 삼켰고, 바닷바람이 불면 원산의 바다 냄새를 떠올렸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도 어머니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고향 양양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내일모레 오겠다”며 원산으로 떠난 형제들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늘 한자리를 지켜온 어머니에게, 만약 가족들이 남한에 살아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방송을 지켜보았다. 화면 속 낯선 얼굴들이 “누구 없습니까”라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머니의 눈빛은 그 속을 더듬듯 따라갔다. 부러움의 눈빛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남한 어디에도 가족이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이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지만 어머니는 그 길에 오르지 않았다. “원산까지 갈 수 있을 때, 그때 가겠다”는 단오한 선언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마저 중단되었고, 어머니의 마지막 희망도 그곳에서 멈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한으로의 길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억지로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에 다녀오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비록 형제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온정리의 온천에서 유년의 추억을 되살리며 위안을 얻으셨을 것이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품고, 나는 오늘도 속초역을 바라본다.
기적소리 하나 없는 역이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기차의 기적소리가 어머니의 그리움처럼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