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또 무엇일까.

by 속초순보기


1986년 2월의 어느 날.

산골의 겨울은 아직 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푸른빛이 비칠 만큼 차가운 잿빛 하늘 아래, 산등성이를 덮은 눈은 밤새 얼어붙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계곡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마치 바늘처럼 살을 찔러 들어왔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깊숙한 곳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이런 날씨가 이어지는 계절엔 시간이 유난히 느리게 흐르고, 따뜻한 아랫목은 몸을 붙잡아 늘어지게 만드는 달콤한 감옥 같아, 한 번 눌러앉으면 좀처럼 일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반복되는 겨울의 어느 날, 어머님이 문득 면회를 가자고 말씀하셨다.


“삼월이 넘어가면 흙 묻힐 날밖에 없다. 지금 면회 다녀오자.”

농사철이 오기 전, 잠시 숨이 트이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뜻이었다.


1985년 10월 28일, 겨우 한 달 지난 솜털 같은 아이를 두고 남편은 논산 훈련소로 향했다.

신병교육을 마친 뒤 자대 배치 소식을 알리는 군사우편은 한 달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편지 속의 ' 양구'라는 글자는 우리가 사는 눈 덮인 겨울 산골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별처럼 아득한 곳이었다.


어머님은 매일 저녁, 손가락을 꼽아 헤아리시며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일을 점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들을 향한 그리움은 아내인 나 보도 더 크고 뜨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님의 마을을 알기에 아이와 둘이 면회를 다녀오겠다는 속마음을 꺼내지도 못한 채 “네…” 하고 아쉬운 목소리로 답했다. 집에서 평창 읍내로 나가려면 재를 넘어 한 시간이 걸린다.


그 뒤 시외버스를 타고 홍천, 신남에서 갈아타 양구에 도착하고, 다시 또 시내버스로 부대까지 가야 하니 하루를 통째로 내줘야 하는 여정이었다.


딸아이를 업은 어머님을 따라 재를 넘었다. 남편을 따라 산골로 들어온 뒤 처음 읍내로 나가는 길이었다. 아이는 이제 막 옹알이를 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편지만으로 안부를 나누던 시절이라 면회를 간다는 연락조차 하지 못한 채 무작정 떠나는 길이었다. 혹여 남편이 훈련이라도 나가 있었으면 헛걸음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겨울바람에 마른 가지가 사소한 흔들림에도 파르르 떨리듯 가슴 한쪽에서 가라앉지 않았다.


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던 면회길.

부대에 도착한 것은 오후 네 시를 훌쩍 넘어서였다.


양구의 겨울은 평창과 다를 바 없었다. 면회소 문틈으로 바람이 휘파람처럼 울어대며 스며들었다. 면회소를 지키는 군인은 바람 소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님 품에서 잠들어 있던 아이를 내려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며, 곧 문을 열고 들어올 남편의 모습을 상상했다.


바삭하게 밀어낸 머리는 어떤 모습일까. 혹한 속에 두툼한 옷은 잘 챙겨 입고 있을까. 무엇보다 네 달 만에 아이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이 조금만 움직여도 어머님과 나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들어오는 이는 대부분 다른 면회객이거나, 업무차 드나드는 군인이었다. 우리보다 늦게 신청한 사람들까지 모두 가족을 만나 떠났지만, 남편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날 기척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 평 남짓한 면회소 안을 빙빙 돌며 군인에게 상황을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잠들어 있던 아이가 칭얼대기 시시작고, 더는 추운 면회소에서 아이를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군인에게 이유를 물었고, 그제야 전화를 걸어 확인한 그는 “연락이 안 갔다"라고 했다. 허탈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추위는 깊어지고, 아이 울음은 커지고, 시간은 어느새 저녁 여섯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연락을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뿐, 구체적인 사정은 들을 수 없었다. 초조함이 가득 쌓여갈 때, 마침내 문이 열리고 남편이 들어섰다. 이제야 연락을 받았다며, 늦은 만큼 일단 읍내로 나가자고 했다.


살을 에는 바람을 뚫고 삼거리로 나와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읍내로 향하는 군인들이 많아 버스는 순식간에 만 원이었다.


아이를 업은 내게 자리 하나가 양보되었고, 앉자마자 등에 업혀 있던 아이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하루 종일 등에 매달렸던 아이는 편안해진 듯 옹알이를 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군인들이 까꿍을 하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조부모, 고모, 나의 얼굴만 보던 아이에게는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이는 멀뚱히 그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금세 입술을 삐죽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이 까꿍을 외치자, 아이의 얼굴이 금방 환하게 풀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군인들에게서 웃음이 새어 나왔고, 어머님은 “다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도 아빠는 알아보네. 핏줄은 어쩔 수 없다."라며 흐뭇해하셨다.


또한 그 순간이 참 신기했다. 같은 복장, 같은 표정, 같은 모자 속에서도 아이는 단번에 자기 아빠를 알아본 것이다.






과연 핏줄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또 무엇일까.

면회 가던 날, 찍어낸 인형처럼 똑같은 옷과 표정을 한 군인들 사이에서 수많은 별들 속에 단 하나의 별처럼 아빠를 찾아낸 그 작은 눈동자.


그 순간 ‘핏줄’은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 끌림이었고, 차가운 이성이 닿기 전 뜨거운 본능이 먼저 도착하는 기적이었다.


남편과 함께한 42년의 세월 동안 부부인연의 끈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결혼생활 중 늘 예기치 않은 비바람을 데리고 왔고. 때로는 그 바람이 등을 떠밀어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버스 안에서 아빠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늘 같은 결론을 내렸다.


' 저 애틋한 핏줄을, 저 자연스러운 연결을 내 손으로 끊어낼 수는 없지."


그 생각 하나가 파국으로 치닫는 나를 붙잡아 주었다. 핏줄로 연결된 끈끈한 힘 덕분에 가족이라는 같은 운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 지금까지 와 있다. 그러고 보면 핏줄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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