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중학생 되는 날, 할머니가 떠올린 23세의밤

by 속초순보기


손녀딸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어느새 훌쩍 자라 성인의 모습을 닮아가는 아이를 바라보니, 마음 한편에서는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서운한 생각도 든다.


14년 전!!

핏덩이 같던 손녀가 태어난 지 단 사흘 만에 우리 집으로 왔던 그날. 당시 딸은 일과 육아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제 막 발을 들인 첫 직장에서 신입으로 배워야 할 것도 많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현실 앞에 서 있었다.


“엄마가 아기 봐줄까?”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딸은 망설이며 물었다.

“엄마도 일하잖아, 어떻게 해?”

“낮엔 육아도우미에게 부탁하고, 밤엔 엄마가 보면 되지.”

그렇게 손녀는 우리 집으로 왔다.







딸이 결혼하던 날, 손녀가 태어나던 날, 그리고 처음으로 비틀거리며 첫걸음을 떼던 순간까지. 그 모든 장면이 아직도 또렷한데, 벌써 중학생이 된다니 믿기지 않는다. 키는 나만큼 훌쩍 자랐고, 말투는 조곤조곤 어른스럽다. 작년까지만 해도 말만 걸면 툭툭 대답하던 아이가, 이제는 눈을 맞추며 차분히 이야기를 건넨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서울 병원으로 달려가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기억도 생생하다. 쉰 살에 할머니가 된다는 말이 어색할 법도 했지만, 나는 그저 “할머니”라는 호칭을 빨리 듣고 싶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손녀가 나를 그렇게 불러주기만 한다면야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분만실 문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였다. 설렘은 점점 불안으로, 기대는 초조로 바뀌었다.

‘내가 딸을 낳을 때도 그렇게 고생했지…’




중학교 입학을 앞둔 손녀의 엄마인 딸을 낳던 그해, 아이는 예정일보다 나흘이나 일찍 진통을 시작했다. 깊은 산골에서 병원 검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열 달을 보냈기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마음이 좀처럼 놓이지 않았다. 불안은 밤마다 숨처럼 따라붙었고, 그래서 더 간절히 아이의 안녕을 빌었다.


그날은 마침 막내 시누이의 운동회 날이었다. 운동장은 동네잔치처럼 북적였고, 사람들의 웃음과 장만해 온 음식 냄새가 운동장에 뒤섞여 흘러 다녔다. 나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뜨끈한 감자를 까먹고 있었다.


그때,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달리기를 못하는 막내 시누이가 온 힘을 다해 뛰는 발의 힘은 운동장이 울리며 마치 땅이 꺼지는 듯했고, 쿵쿵거리는 소리에 맞춰 내 배도 함께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머니… 배가 아파요.”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하루가 지나도록 아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배는 살살 아팠고, 몸은 점점 아래로 쏠렸다. 어머니와 남편은 가을걷이로 바빴고,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가을의 초입 풀벌레의 울음소리만이 시린 적막을 깨우는 방에 홀로 누워 있었다. 적막한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고향바다에서 보았던 그 파도처럼 계속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혼자 아이를 낳게 되면 어쩌지.’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럴 때면 누구나 엄마를 찾게 되는 법인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남편을 따라 산골로 들어왔고,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내가 돈을 벌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여움 앞에서 삼 년 동안 집에 오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던 터였다. 공부 잘한다고 동네에서 으쓱해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를수록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겁먹지 말라며 손을 잡아 줄 사람, “괜찮다”라고 말해 줄 단 한 사람. 그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틀이 지나도록 아이는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시부모님과 남편은 마당을 서성거리며 발만 동동 굴렀다. 병원 검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몸인 데다, 버스조차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골이니 모두의 얼굴에는 불안이 짙게 드리워졌다. 진통은 분명 왔는데, 아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러다 산모가 먼저 잘못되는 거 아니야 하는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남편은 15분 거리의 이장 집으로 달려 택시를 부르러 갔다. 동네에서 택시를 부르려고 해도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때문에 차가 망가진다며 기사들은 손사래를 쳤었다. 두 배 값을 주겠다고 사정한 끝에야 겨우 들오곤 했던 동네였으므로 그마저도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어,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시간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만에 도착한 택시를 타고 대화 병원으로 갔지만, 네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제 가장 초조해진 사람은 의사였다. 내 다리를 살피던 그는 얼굴빛이 굳어지며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읍내로 택시를 부르러 나갔다. 금방 올 줄 알았던 사람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나를 두고 도망간 건 아닐까,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스쳤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택시 회사 교육이 있어 기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남편은 교육장까지 찾아가 사정을 설명해 겨우 차를 끌고 왔다는 것을.


원주 기독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는 의사까지 동승했다. 차 안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어쩌나 싶어 온몸에 힘이 들어갔고 의사는 아이의 머리가 보인다며 기사를 재촉했다. 사색이 된 남편을 바라보았다. 염려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의 손은 핸들 위에서 땀으로 번들거렸다.


40여 분 만에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실로 들어갔고, 의료진의 빠른 처치 속에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온통 변투성이었다. 나올 시간이 지나 뱃속에서 응가를 해 버렸다는 것이다. 변에는 균이 있을 수 있어 검사를 위해 아이는 나와 함께 퇴원하지 못했고, 일주일 뒤에야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입원실로 올라가 보니 같은 날 출산한 산모가 여덟 명이나 있었다. 병상마다 시부모와 친정 부모가 둘러앉아 웃으며 축하를 건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였다. 스물셋, 나도 남편도 생명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서툴렀고, 출산의 기쁨을 느낄 수도 축하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간절해졌다.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여덟 남매를 낳아 키워 낸 엄마. 존경스러웠고, 그리웠고, 무엇보다… 나도 이제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병실 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오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기대를 품고 자꾸만 문쪽을 바라보았다.


입원 수속을 하러 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맞은편 병상에 있던 시어머니 한 분이 다가와 과일과 주스를 내밀었다. “왜 혼자예요…?”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앳된 산모에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을 하셨는지, 그분은 더 묻지 않았고 남편이 돌아온 뒤에도 이틀 동안 우리를 챙겨 주셨다.


원주 원동에 산다던 그 할머니. 혹시… 엄마가 보내 준 천사는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가슴이 따뜻해지고 든든했다. 일주일 뒤, 아이는 그해 농사 수익 전부와 맞바꾸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후면 남편은 군대에 가야 했고, 고추 농사 돈은 모두 병원비로 사라져, 시부모님은 내년 농사가 걱정이었다. 물론 남편과 아빠가 없는 며느리와 손녀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도 함께. 나는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밤마다 겁이 났었다.





예정일을 훌쩍 넘겨서야, 의사의 손길에 이끌려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본 딸아이. 그 치열했던 사투의 흔적은 딸아이의 이마와 귀 사이, 옅게 패인 의사의 손가락 자국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앞에 앉은 딸의 얼굴을 거울을 보듯 가만히 응시할 때면, 나는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산골의 짙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스물셋의 나를 다시 마주한다. 산기슭의 서늘한 적막이 뼈마디까지 스며들던 그 좁은 방에서,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엄마'라는 이름을 목구멍 뒤로 눌러 삼키며 홀로 공포를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쳤던 그 어린 여자를 만난다. 피가 맺히도록 이를 악물고 생의 가장 외로운 문턱을 넘어야 했던, 꽃 같던 시절의 한 여자.


딸은 내가 지나온 23살의 그 길을 걷기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난 딸이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고 싶을 때 그 말이 엄마가 되고,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당당함 뒤에 든든한 엄마가 되기를 나는 기도했다





손녀를 처음 품에 안던 날 설렘과 긴장을 잊지 못한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사흘 된 핏덩이를 품에 받아 안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던 그 경이로운 생명은 내 아이와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 혹여나의 투박하고 서툰 손길에 이 귀한 보배가 부서질까 봐, 밤마다 아이의 미세한 숨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려서 서툴렀고, 사랑의 표현을 알지 못했던 딸의 시간에 손녀를 향한 사랑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였고, 어느덧 아이는 제법 성인다운 말을 할 줄 아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아이가 눈부시게 성장할수록, 내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짙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아이의 키가 내 어깨를 넘어서고, 통통했던 젖살이 빠져나가 어른스러운 윤곽이 드러날 때마다 나는 기특함보다 먼저 가슴께가 아릿해오는 것을 느낀다.


성장이란 당연한 순리이고 축복받아야 할 일임에도, 자꾸만 시간을 거스르고 싶어진다. 내 품에 쏙 들어오던 그 작고 보드랍던 감촉, "함미 ~~"라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품을 파고들던 그 어린 시절의 아이가 그대로 멈춰 있어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


어쩌면 나는 아이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내 손때 묻은 가장 소중한 시절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이토록 서운한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내민 손은 이제 내 손보다 커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큰 손 너머로 꼬물거리던 작은 아기 손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훌쩍 앞서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짐한다.


이 서글픈 애틋함마저도 사랑의 한 조각으로 품기로. 비록 아이는 자라나 내 품을 떠나가겠지만, 내 가슴속에는 그날 처음 안았던 따뜻한 생명의 무게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 중학교 입학 선물로 나는 노트북을, 할아버지는 침대를 사주었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아이인데도,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를 몇 번이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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