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선 설악산으로부터 매섭게 내리닫던 찬바람은, 박물관 마당에 잠시 내려앉아 휘익 한 바퀴 휘몰아치더니 이내 거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아난다. 살을 에는 추위보다 따가운 것은 바람이 던지고 간 흙모래다.
얼굴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모래 알갱이들로 눈조차 뜨기 힘든 오후. 이런 궂은 날씨라면 으레 방문객의 발길이 뜸하리라 생각했건만, 사정은 정반대이다.
속초시립박물관은 속초의 역사와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곳으로 지형상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겹쳐지므로 다른 박물관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이 일으켜 세운 도시로서 비교적 최근의 역사, 속초만의 역사인 실향민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 놓은 곳이다. 속초만의 역사를 누가 궁금해할까 의아해 하지만 , 개관 20년 만에 2백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그야말로 속초에서는 핫플인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 방문객 중 아이들을 가장 좋아한다. 아이들을 보면 늘 보고 싶고 그리운 손주들이 겹쳐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키는 건 세상 모든 것을 온몸으로 부딪쳐 배우려는 아이들 특유의 시도 때문이다.
박물관 마당에는 제기와 굴렁쇠, 고리 던지기, 투호, 죽마 같은 전통놀이 기구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이 기구 들은 교과서 속이나 명절날 방송, 민속촌 등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기구들로, 아이들에게는 생전 처음 마주 하는 수수께끼 같은 흥미로운 물건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본래의 용도를 몰라도 당황하지 않는다.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해 본다. 굴렁쇠를 손으로 밀거나, 고리를 허공에 던져보고, 죽마를 질질 끌어 보기도 하면서 나름의 연구에 몰두한다. 정답이 없는 놀이판 위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며 즐거워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은 요동친다. 놀이기구 사용법을 알려 주고 싶기 때문이다. 슬며시 다가가 ' 이거 조금 더 잘하는 법 알려줘도 될까요 " 말은 건넨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긴 설명은 필요치 않다. 한 번의 시범만으로도 아이들은 ' 아하!!' 하는 깨달음의 탄성을 내뱉는다. 이때부터는 숙달이 된 아이도, 시범을 보인 나도 즐거워진다.
오늘 마당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가 핸드폰을 안내 표지판 위에 간신히 세워두고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표지판 위에서 떨어지려는 듯 위태태한 핸드폰도 걱정도 되었고, 그 각도를 보니 제대로 찍힐 것 같지도 않았다.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오지랖이 발동했다.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까요?"
조심스레 건넨 제안에 가장 먼저 답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네!!" 하고 우렁차게 터져 나온 녀석의 대답 속에는, 간절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비뚤어진 각도를 바로잡고, 뷰파인더 속에 단란하게 모인 세 사람을 정성껏 담아 드렸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아이의 부모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 말뒤로 돌아서려던 찰나, 뒤쪽에서 타다닥 발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그 아이가 내게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손을 쑥 내밀며 수줍게 한마디를 건넸다.
"이거,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아이가 건넨 것은 사진을 찍기 위해 안내판 위에 함께 두었던 과자 한 봉지였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아이의 엄마가 깜짝 놀라며 웃음 섞인 핀잔을 준다.
"어머, 너 엄마한테도 안 그러더니 웬일이야?"
하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에는 배려에 답하는 법을 아는 아이가 기특하다는 숨길 수 없는 대견함이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오늘 박물관의 수많은 전시물과 유물들 사이에 거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다. 진정한 배움이란 머리로 기억하는 지식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내미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이가 내민 과자 한 봉지는 세상 그 어떤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문장이었고, 아이의 수줍은 미소는 그 어떤 유물의 가치보다 눈부셨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가장 크게 전달되는 마음... 나는 오늘, 아이가 건넨 과자 봉지에 남아 있는 마음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짐한다. 열린 마음으로 이웃에게 먼저 내밀 줄 아는, 그런 '진짜 어른'으로 늙어가겠노라고 말이다.
박물관 마당에 여전히 찬바람이 불어오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이가 심어준 봄의 씨앗이 벌써 고개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