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후
버스 터미널에서 엄마를 만나 숙소부터 잡고 자리를 잡았다. 내 등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이불을 포개고 그 위에 뉘었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등에 매달렸던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관의 오래된 가구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작은 창문이 한 개뿐인 방안은 어둑어둑했다.
남편과 나는 서로 쳐다보기만 한 채 조용히 앉아서 엄마의 눈치만 살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시간도 장소도 우리도 알 수 없게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오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고 있지 않는 우주공간에 떠 있는 듯했다. 누구라도 먼저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우주공간에서 혼자 떠돌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드디어 엄마가 먼저 입을 여셨다. “ 자네 어쩌려고 이런 집안에 장가를 든다고 하였나”
“ 형제도 8남매이고, 야가 큰 딸로 맏사위는 아들 맞잡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힘이 들 텐데 말이야.” 이런 말을 꺼내다니, 내가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엄마는 잊은 듯했다. 그동안의 맘고생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이도 생기고 이젠 어쩔 수 없지 허락할 수밖에 없어서 포기하셨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오히려 처음 보는 사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물음에 남편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었다.
엄마에게 혼나고,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어이없게 엄마하고 화해를 했다. 사실 나는 친정집에서 맏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8남매의 둘째였지만, 위로 있는 언니는, 부모님이 분가하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할머니 댁에 놔두고 나왔기 때문에 사실상 맏딸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사위가 맏아들이나 마찬가지였기 였다.
잠이 깬 아이가 낯선 사람인 엄마를 보자 울음부터 터트리고, 나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한번 알아보려 하면 할수록 내 품을 파고들었다. 아이가 외부사람을 본 것은 외할머니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산골에서 접촉하는 사람이 없어 낯가림이 심한데, 낯설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엄마는 가져온 가방을 끌어당겨 가방 속에서 아기 옷을 꺼냈다. 비닐과 태그를 뜯어 내고 아이의 몸에 맞추어 보았다. 옷 사이즈가 아이에게 딱 맞았고, 색깔도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엄마의 안목이 대단한 것인지, 8남매를 길러 본 노하우인지 정말 딱 맞고 어울렸다.
그날 밤 엄마와 나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는 잠을 잤고, 남편은 몇 번을 뒤척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을 때 부모님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다고 했다. 우리 딸이 살아있는지만 알려달라고 했더니, 점쟁이는 서남쪽의 동네에 가서 잘 살고 있고, 1년 이내에 반드시 연락이 올 테니 걱정하지 말랬다고 했다. 점쟁이가 그 말이라도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엄마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말을 해준 점쟁이에게 감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시부모님과 집안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으셨다. 결혼에 대해서 엄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 집안의 가풍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집안이어야 한다고 했다. 굳이 우리 집과 시댁을 비교하자면 시댁 쪽이 더 가풍이 좋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집안이었다. 처음 시댁에 들어가서 밥을 먹을 때 한 밥상에서 아들딸 구별 없이 밥을 먹는 것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문화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모든 가정의 일들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먼저 밥을 먹기 전에 숟가락을 들어서도 안되며, 아버지가 밥을 다 드시고 난 후에야 우리가 남은 반찬으로 밥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거나 ,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기라도 하면 바로 뺨 스매씽을 날렸다. 그런 존재인 아버지가 나의 소식을 처음 듣고 달려왔다가, 하늘만 쳐다보고 울고 가신 후, 여자는 일부종사해야 한다고는 말은 했지만, 따듯한 말씀으로 용기를 주었던 아버지에게 놀랐었다.
내가 집을 나올 때 까지도 아버지의 권위와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우리보다 우선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 가정 내 생활에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부모님과 한상에서 밥을 먹고, 남녀가 구별이 없다는 것은 교과서의 인쇄활자로만 존재했었다. 시댁 분위기는 우리 집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시댁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내가 남편은 잘 골랐다며, 어렵게 살아도 집안의 가풍이 최고라며 또 한 번 말씀하셨다.
난 엄마에게 내가 아무 말 없이 배우자를 따라 집을 나갔기로서니 어떻게 자기 눈 자기가 찔렀으니, 고생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냐며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른 자식들보다 너를 가장 믿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기분을 아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언니가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무슨 말로 이해를 시키고, 특히 성질 급한 아버지가 너에게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엄마가 더 세게 나왔다고 했다. 그랬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하던 엄마는 나의 편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은 얼굴을 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되고 마는 존재인 것이다. 나도 내 아이에게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 주어야지 다짐을 했다.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뒷날 우리는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터미널에서 헤어질 때 엄마는 아직은 집에 올 때가 아니며, 친정집에 올 때 여자 혼자 오는 것이 가장 보기 싫다며, 남편이 군 제대를 하면 그때 함께 오라고 했다.
산골 시댁으로 들어오는 길은, 그동안 한숨을 쉬며 걱정한 일들이 다 사라졌고, 엄마의 다시 안겨 있는 듯한 안도감에 마음이 푸근해지고 용기가 생겼다. 남편 없는 산골의 생활을 거뜬히 해낼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