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만에 친정엄마를 만나다

군입대후

by 속초순보기

산골로 들어온 지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긴 편지글을 마지막으로 친정집과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가끔 여동생들이 소식을 전해 주어 단편적으로 듣기는 했지만, 친정엄마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내 안부는 묻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중간에서 여동생 둘이 엄마를 설득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한테 화가 나 있다고 했다.


군대 가기 전 남편이 사다 놓은 육아 관련 책에는 8개월부터 아이가 서기 시작하여 돌 전후로 걷는다고 했는데 아이는 돌이 지나도 걷지를 못하였다. 봄부터 마당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키기 시작했다. 젖이 모자라 늘 배고파했던 아이라 지켜보는 나는 마음이 찔어질듯 아팠다. 젖을 떼고도 아이는 밥양이 작았다. 그리고 뭐든 먹지 않으려고 했다.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아이는 넘어지면서도 걸으려고 노력을 했다. 다행히 15개월이 되어서야 아이는 걷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하자 마당 밖을 나가려고 하여, 옆에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사일로 바빠지기 시작한 산골에서 손하나 더하는 것이 아주 요긴한데, 나는 아이를 핑계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게 되었다.


여름이 되자 남편이 15일의 휴가를 받아 나왔다. 아빠의 존재를 알게 된 아이는 아빠와 급속히 친해지더니 아빠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남편도 아빠가 없는 동안의 사랑을 다 주려는 듯 최선을 다 하는 것 같았다. 아이도 15개월이 넘어가고 말도 제법 하고, 적적한 산골의 집에서는 아이의 재롱에 모두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농사일에 바쁜 시부모님도 온 마음을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가 점점 커 갈수록 엄마에 대한 그림도 같이 커져 갔다. 보통의 딸들처럼 아이를 재롱을 엄마에게도 보여 주고 싶고, 엄마의 육아비법을 전수받고도 싶었는데, 엄마하고 화해할 방법이 없었다. 아이가 백일이 되던 날 어머니와 내가 둘이 읍내에 가서 찍은 사진이 달랑 한 장뿐이라 엄마에게 보내 줄 수도 없었다.


휴가 나온 남편에게 친정에 한번 가자고 했다. 부모님에게 사위로서 정식으로 인사도 못 드렸기 때문에 인사도 드리게 하고 싶었고, 아이도 보여 주고 싶었다. 서울에 있는 동생에게 엄마를 보러 갈 테니 잘 설득해 달라고 편지를 넣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는지,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며, 인근 도시인 강릉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엄마도 사실은 내가 보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빰을 타고 흘렀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했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드디어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날이 정해 졌다. 자기 눈 자기가 찔러 고생한다며, 생고생하게 놔두라고 아픈 말을 쏟아내던 어머니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남편과 아이를 소개해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남편과 아이가 나란히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아 마루에 앉아 둥근달을 쳐다보니 혼이 날 지언정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이 옷을 입었다가, 저 옷을 입었다, 하며 분주했다. 변변한 옷이 없는 나에게 어머니는 당신의 원피스를 입고 가라고 내주었다. 아무리 내가 머리는 뽀글 보글 하고, 몸빼 바지를 입은 촌 아낙의 모습이라고 해도, 나이 차이가 30년이나 나는 시어머니의 옷을 입을 수는 없어, 아무려면 어때 하는 심정으로 처음 입어 보았던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아이는 아빠와의 외출이 즐거운지 재를 넘는 내내 종알종알 이야기를 해 댔다. 우리 세 식구가 외출을 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남편과 나는 죄인의 심정이 되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마음은 무겁고, 결코 즐겁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아흔아홉 구 비의 대관령처럼, 내 마음도 이리갔다 저리갔다 흔들렸다.


직행버스가 대관령 정상에서 강릉 방향의 내리막길을 달리자,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내 코로 훅 들어왔다. 바다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그리워하던 냄새 바다 냄새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의 냄새이고 고향의 냄새였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우리 형제들은 바다에 자주 나갔다. 엄마가 바다에 나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다에서 나오는 미역, 홍합, 파래 등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가 바다에서 반찬거리를 채취하는 동안, 수영을 하며, 물싸움을 하며 바다를 놀이터로 삼아 신나게 놀았다.


엄마는 바다를 나갈 때는 커다란 밥통에 밥만 준비하여 가지고 나갔다. 미역을 뜯어 즉석에서 쌈을 싸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은 바위에 붙은 홍합을 따서 날것으로 먹다가, 입술 언저리를 베어

피가 나오면, 더 아픈 것처럼 울었다. 그럼 엄마는 미역이 담긴 광주리를 내 던지고 우리 곁으로 다가와 상처를 보듬어 주었다.


내던진 광주리에서 떨어진 미역이 파도에 떠밀려가 , 다시 미역을 채우려면 그만큼 시간이 늦어져, 어떤 날은 달과 별을 보며 집에 돌아오기 도 했다. 파래를 많이 채취한 날에는, 광주리에 담아 물이 빠지길 기다렸다가, 엄마는 파래를 머리에 이고, 우리는 빈 광주리를 들고 뒤에서 졸졸졸 따라가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엄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져온 파래는 체에 받혀 물기를 뺀 후 채반에 널어 말려, 기름을 발라 구워 먹기도 하고, 이웃들과 친척들에게도 선물로도 보냈다.


엄마와 함께했던 어릴 시절 바다의 추억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강릉 터미널로 들어 서고 있었다. 차창밖으로, 엄마를 찾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친정집 동네에서 오는 버스는 이미 도착했다는데, 터미널 내를 한 바퀴 돌아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미워 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약속 날자가 다른 날이었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터미널 입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한 손에는 보따리를, 다른 한 손에는 선물박스를 가지고 터미널 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먼저 엄마를 보았는데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엄마가 나를 발견해 주길 기다렸다. 그래야 엄마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머리부터 쓰다듬으며, 어디 보자, 잘 지냈는지... 하며, 위아래를 살폈다. 옆에 있던 남편이 일단 숙소부터 잡고 이야기를 하자며, 터미널 인근의 여관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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