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와서 첫날을 제외하고는 치료를 받기 위해 선생님을 뵌 적은 별로 없었다. 정상적인 다리와 같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며, 발 끝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놓은 것이 다였고,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절대 무의미한 치료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다친 다리를 펴면 더 길어져서 정상적인 다리와 비교하면 5cm 더 길다. 아직도 그대의 치료에 대해서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곱 살짜리가 병원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으려니 얼마나 좀이 쑤시겠는가. 볼 책도, 장난감도 없는 병상에서 나는 하루 종일 천장을 올려다보며 엄마가 온다, 안 온다.. 를 하다가 다리에 매달려 있는 모래주머니를 침대에 올려놓고 들어보기도 하고, 주먹으로 쳐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안 온다에 병실에 들어선 엄마에게 혼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의사에게 자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의사를 만나고 온 아버지는 매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병원에 더 있어야 한다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나는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 그 당시의 말로 표현하자면 절뚝발이였다.
병명은 알 수 없었지만 3살 때에는 아예 걷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6살이 되고 아버지가 취직을 하게 되고 취직한 회사에는 부속병원이 있었다. 아버지 회사에서는 가족들이 아플 때 병원비가 지원되었다. 그래서 7살이 되었을 때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다리를 고치려고 그 회사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점점 지겨워 지고, 동생들도 병원으로 놀러 오는 것이 재미 없어질 때쯤 나는 다리에 매달린 모래주머니를 떼고, 깁스를 하였다. 기브스를 한 이후에도 별다른 진료는 없었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동생들은 병원에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매일 밥을 해 날랐고, 저녁에는 주무시고 갔다.
한여름의 병원은 더웠다. 계속되는 장마로 습기가 병실을 가득 채웠고, 알코올 냄새와 더해져서 병원환경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이라도 먹이겠다며 매일 밥을 병원으로 가져왔지만, 밥도 먹기 싫고 밥맛도 없었다. 물론 차도도 없었다.
비 오는 날 혼자 병원 창밖을 바라보았다. 병원 마당은 비로 인해 움푹움푹 패어 있었다. 비가 오고 마당이 패어 있어도 밖으로 나가 뛰어놀고 싶었다. 동생들과 뛰어놀던 생각도 간절해지고 집으고 가고 싶어졌다.
기브스를 한 다리에는 여전히 모래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혹시나 모래주머니의 모래가 다 없어지면 집에 갈 수 있으려나 해서 주머니에 구멍을 내서 모래가 술술 빠져나가게 하여 빈주머니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병원생활에 지쳐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업고 병실 밖을 나섰다. 아버지 등에 업혀 집에 가는 군이 생각을 하며 집에 가면 무엇부터 할까 상상을 하던 중 도착한 곳은 진료실이었다. 진료실에는 처음 보는 기계들이 천장에 달려 있었고, 수술도구들이 있었다. 수술도구를 보니 무서워져 아버지 등에 더 달라붙었다.
아버지가 나를 의사 앞에 내려놓자, 의사는 수술대 위에 올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무슨 기계를 돌리는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계소리에 기가 죽어 눈만 굴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한테 나를 꼭 붙잡으라고 하시고는 커다란 주사를 무릎으로 가져오는 것이 보였다.
다리에는 뼈밖에 없는 뼈에다 커다란 주사를 놓는다고? 무서워져서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게다가 온몸을 비틀며 발버둥까지 치자, 의사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고, 아버지는 힘주어 나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매었다. 그러자 의사는 무릎에 주사를 놓았고, 나는 병원이 떠나가도록 울어 대다가 기절을 해 버렸다.
무릎에 주사를 맞은 다음날 병실로 아버지가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빨리 짐을 싸라며 어머니에게 말하고는 나를 들쳐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어머니는 주사를 맞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냐며 말씀하시자, 아버지는 빨리 짐이나 싸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놀란 어머니는 짐이랄 것도 없는 짐을 쌌고, 아버지는 병원을 나섰다. 영문도 모른 채 짐을 싸던 어머니가 아버지 등 뒤에서 왜 다 낳지도 않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냐며, 만류하자 의사가 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했다며, 어서 빨리 따라 나오라고 했다.
깁스한 상태인 나를 등에 없고 아버지는 도망치듯 나왔다. 그 뒤를 따라 커다란 대야에 이불과 자잘한 그릇들을 잔뜩 담아 머리에 이고 따라 나왔다. 앞서 걷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부지런히 걷기만 하였다.
우리 집 앞에는 강보다는 작지만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을 건널 때는 돌다리를 이용했으나, 한여름 장마로 인하여 물이 많이 불어나 돌다리는 보이지 않았고, 물살도 세었다. 흙탕물인 개울물은 엄청난 기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개울을 건너려고 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물살이 너무 세서 위험하니 산모퉁이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등에 업힌 나를 단단히 동여 메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황톳물에 바닥은 보이지 않고, 강한 물살에 아버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버지 등에서 내려다본 강물은 금방이라도 아버지와 나를 쓸어 갈 것 같았다. 흐르는 물살에 돌 굴러가는 소리는 엄청나게 크게 들려, 이러다 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굴러가는 돌이 아버지의 다리에라도 친다면, 강물에 쓸려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몸은 점점 흔들렸다. 강 가운데로 들어서자 물살은 더욱 거셌고, 아버지는 멈추어 섰다. 아버지 등에서 내려다본 물살은 더욱 세지고, 물빛은 흙빛이었다. 나는 더욱더 아버지를 움켜 잡았다. 깁스 한 내 다리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다리를 잠기지 않게 하려고 나를 들어 올렸다. 난 아버지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 이후 강을 건너는지 기억에 없지만, 나는 아랫목에 누워 있었고, 2시간 뒤에나 어머니가 오셨다. 그 뒤 나는 기스브를 한 채 한 달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기브스를 톱으로 잘라내 풀어 주었고, 점차 다리는 정상이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허락도 없이 남편을 따라 나간 나에게 결혼을 승낙하며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무려 6장이나 되었다.
편지 속에는 걷지를 못해, 아버지 마중을 나오지 못해 마루 끝에 혼자 울고 있던 이야기, 동생들보다 달리기에서 뒤처지던 이야기, 동네 사람들이 절름발이라고 놀려 댔던 이야기와 함께 다리를 자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장마에 물이 불어난 개울에서 죽으려고 했던 일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장애를 가진채 살아야 하고, 주위의 놀림을 받을 것은 뻔한 상황에서 같이 죽으려고, 나를 집에 데려다 놓고, 어머니를 데리러 와도 되는데, 일부러 어머니를 멀리 돌아오게 하였다고 했다. 특히 함께 죽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나의 다리 한쪽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하다. 걷는 것을 좋아해서 늘 걸어 다니는데 말이다.
아버지의 순간의 선택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나는 걸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감사를 드린다. 살아있는 내내 나는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