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동네에는 방학을 이용해 대학생들의 의료봉사가 있었다. 의료봉사는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실시되었고, 주로 서울에서 온 의대생이 주축이었다. 의료봉사단에는 의대생을 비롯해 의사, 약사, 간호사도 끼어 있었다. 서울에서 의대생들이 농촌까지 의료 봉사를 왔으니 동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일이어서, 학교로 진료를 받으러 가는 날은 동네 전체가 일을 하지도 않았고, 집집마다 먹거리와 농산물을 조그마한 보따리에 싸서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의료봉사는 동네에서 가장 기다리던 일이었고,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은인이었던 의료봉사가 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한여름 의료봉사단들이 마을 한가운데 큰 도로를 지나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이 다 보였다. 봉사단들의 모습을 발견한 어머니는 그때부터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내게 다짐을 받곤 했다. 학교에 가서 꼭 진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밖에서 놀더라고 마당을 벗어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러나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눈을 피해 나는 강으로 내달렸다. 형제들과 강에서 물놀이를 즐기거나 쪽대로 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해가 중천에 뜨고, 머리가 뜨거워질 때면 나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을 어귀에서 들려왔다. 엄마는 나를 찾으면서 우리 형제들 이름을 하나씩 다 불렀다. " 순복아, 후복아, 일복아, 정복아" 하면서. 우리 자매들 이름을 다 부른 이유는 나는 대답을 안 할 테고, 누구라도 하나만 대답하면, 위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오늘 꼭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엄마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다. 엄마가 나를 찾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째 의료 봉사단으로부터 진료를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주사를 맞기도 싫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강 중심으로 개구리헤엄을 치며 들어갔다. 그럴수록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절박해졌다.
같이 헤엄을 치던 동생은 “ 언니, 엄마가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우리까지 혼난단 말이야”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도 못 들은 척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기를 반복했다.
물속에서 밖을 살펴보니 어머니가 강가와 다 와 있었고, 목소리를 더욱 절박해졌다.
늦장을 부리며, 물밖로 나오자 엄마는 나를 들쳐 없고 뛰기 시작했다. 학교까지는 한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학교 정문에 도착하자 정문에서부터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독약 냄새를 맡으니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업혀있는 나를 내리고는 손부터 꼭 잡았다.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르신들이었고, 어린이는 나밖에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진료를 하는 의대생에게 엄마의 말은 늘 똑같았다. 매년 들어도 의대생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뿐이었다. 엄마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진료를 마친 엄마는 나를 다시 들쳐 없었다. 도착하기 전에는 나를 업고 달리기 선수처럼 달리던 엄마였는데 엄마의 등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진료소에서 처방해 주는 약을 타고 돌아온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의료봉사는 매년 이루어졌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고, 시골에 의원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온 대학생들에게 진료를 받고 진단을 받는 것만으로 부모님에게는 위안이 되었을지 모른다.
한방 대생의 의료봉사가 있을 때는 엄마는 더욱더 힘들어했다. 어린 내게 견디지도 못할 침을 맞히려고, 발버둥 치는 나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엄마의 얼굴은 고통 그 자체였다. 침을 맞고 난 후에 받은 처방은 당시 형편으로는 구할 수도 없는 약재였기 때문에 민간처방을 따랐다.
민간처방에는 소똥을 무릎에 바르는 것도 있었다. 소똥을 무릎에 바르는 날은 온 집안이 냄새로 번져 가족들 모두 고역이었다. 한여름에 민간처방으로 쓰인다고 생각해 보면 그 냄새의 상황이 충분이 가늠이 될 것이다,
양의든 한의든 대학생이 다녀간 후에도, 민간처방을 한 후에도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엄마와 아버지의 실망과 고통은 더해갔다. 나도 진이 빠지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ㅣ.
동네에서 놀림을 당할 때도 많았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고, 동생들에게는 보호의 대상이었다.
7 곱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회사 내에 부속병원이 생겼고, 입원치 표를 받았으나, 효과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알 수없다. 가끔 기적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주위에서 병신, 절름발이라고 놀림을 받던 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낳아져서 걷기 시작했고, 점점 나아져,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정상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