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소중한 딸

by 속초순보기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사람은 딸이다. 일찍 결혼하고, 딸을 낳고, 남편은 입대를 하고... 취직하고, 퇴사하고, 다시 취직하는 동안 가장 고생한 사람이 딸이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딸아이를 낳던 날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글쓰기의 대부분의 우리 딸 이야기 일 것이다.


군입대를 한 달여를 앞둔 9월 14일이었다. 막달이 된 나는 마당에서 허드렛일 하며, 밭으로 일을 나간 부모님과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내일하며 막달이 되자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해야 하고, 나와 아기 모두 모두 건강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출산 중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동차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서는 정말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지난 8월부터는 아버님이 아프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의료보험이 없어 의료비 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출산을 위해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병원은 임신 확인을 위해 가본 것이 전부인 나는 “ 이 산골도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어떻게 잘 되겠지, 다들 산골에서도 아이도 낳고 잘 키우잖아….” 하면서 나에게 안심을 시켰다. 5개월까지는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들어하자 읍내 장날에 나가 어머님은 바다가 고향인 나를 위해 해산물을 사 오기도 하셨다. 내륙의 읍내에서 판매되는 생선은 고향의 생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생선을 먹고 나서야 기운을 차리고, 입맛이 돌아왔다.



어머니와 동네 어른들은 아이는 작게 낳아서 크게 키워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하루에 1시간 정도 낮잠을 자는 것 말고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막달이 되자 어머니와 남편은 읍내 장날을 이용해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사들였고, 천을 끈어 기저귀도 만들어 삶아 착착 개어 놓았다.



산일이 점점 가까워지지 친정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해준 밥도 먹고 싶었고, 출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 듣고 싶었다. 친정어머니의 위로와 격려도 받고 싶었지만, 집안 창피하다며 연락도 하지 말고, 집에는 절대 오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아 고개를 저었다.



마당의 담에는 돌단풍이 가을을 재촉하며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담 넘어 큰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과연 이곳이 사람 사는 동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한적했다. 저 큰길은 내가 이 산골로 들어와서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길이었다.


읍내로 가려면 집 앞 큰길을 나가 30분을 걷고, 1시간을 재를 넘고, 다시 버스를 타고 10분을 더 가야 했기 때문에 임신 중인 나는 한 번도 큰길을 나가 읍내를 다녀온 적이 없었다. 생활필수품과 아이의 출산용품은 주로 어머님과 신랑이 이웃집 경운기를 얻어 타고 나가 사들여 왔다.


건강하게 출산을 하고, 아이를 안고 저 길로 나가 언제쯤 친정으로 갈 수 있으려나 생각하면서 읍내로 향하는 길을 한없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부모님과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맞추어 밥을 하려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세 발을 옮기자 아랫배가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아랫배가 뭉치는 것 같았다. 출산일은 아직 4일이나 더 남았는데, 출산징후는 아니겠지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들아와 쌀을 씻고, 불을 지피기 위해 아궁이에 앞에 앉으려고 했으나, 앉을 수가 없었다. 아랫배가 다시 당기기 시작했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겁이 덜컥 났다. 마당으로 나와 부모님과 남편이 오길 기다렸다.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길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아랫배는 점점 아파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님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출산하려는 징후라며, 얼른 방으로 들어가 출산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방으로 들어가 출산을 기다렸으나, 3일이 지나도록 출산을 못 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급해진 사람은 시부모님이었다. 시댁에서는 나를 받아들였지만, 당신의 아들은 아직 처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산통을 시작한 지 3일째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남편이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산골의 교통수단은 경운기였지만 우리 집엔 경운기 없었다. 유일하게 읍내에 나가는 장날에 우리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이웃집 경운기를 차비 조로 얼마를 챙겨주며 얻어 타고 다녔다. 하지만 산모를 경운기에 태울 수는 없어, 남편은 이장댁으로 달려갔다. 30분 후 돌아온 남편은 택시가 올 수 없다고 하여 부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택시가 다 망가지고, 택시비보다 수리비가 더 든다며 평소에도 이 산골에는 택시가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한번 들어오면 택시비는 엄청 비쌌다. 고추를 6근을 팔아야 택시비가 되는 큰돈이었다.


설상가상 그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기 때문에 택시는 더 오려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며 어머니는 출산을 쉽게 하는 방책들을 계속해서 제시했다..


날계란을 한입에 쏙 털어 넣어라. 이웃집은 어떻게 해서 순산했다고 하니 너도 그렇게 해라" 등등. 그렇게 하룻밤을 지나도 아이는 나올 생각도 않았고, 나는 점점 더 지쳐갔다.


사람 잡겠다며 아버님은 사색이 되어 빨리 이장댁으로 가 택시를 부르라고 성화셨다. 다행히 폭우가 그쳤고, 산모라는 사정을 들은 택시가 들어와서 읍내 병원으로 향하였다. 출산일을 사흘이나 넘겨 병원에 도착한 나는 다시 한번 큰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고, 임신 중 한 번도 진료받은 기록이 없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의사와 동행하여 원주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어 출산을 하였지만, 출산이 지체되어 아이가 뱃속에서 배냇 똥을 보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의사는 아이의 상태를 검사해야 한다며 산모만 퇴원을 시켜 버렸다. 그 후 아이는 3일을 혼자 병원에 있다 퇴원하였고, 그 해 농사지은 농작물 판매대금의 전부가 병원비로 쓰였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까지의 많은 사연을 접어 두고라도, 아이를 출산하고 남편은 군대에 갔다.


군대 간 2년 7개월 동안은 아이와 나는 산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열심히 살았고, 직장을 잡고 읍내로 나와 딸은 어린이집을 다녔다.


딸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도 한 번도 가기 싫다는 말없이 씩씩하게 잘 다녀 주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직장생활을 하는 나를 대신하여 방과 후 와 방학 때는 동생을 보살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원에 가본 적 없이 공부도 잘해 주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걱정시키지 않았다.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부모 도움 없이 결혼도 하였다.


그런 딸에게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다. 낳아만 주었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로 우리 딸은 저절로 컸다. 나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할 것이다. 결혼하고 독립한 딸이지만 무엇이든 딸을 위해 할 작정이다. 언젠가는 나를 필요로 할 날이 올 것이다 생각하며 딸을 위해 달려 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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