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병으로 걸을 수도 없었던 어린 시절도 보냈고, 8남매 둘째로 위의 언니와 여동생은 못 가는 고등학교도 다녔고, 학력고사를 잘 치르고도 대학을 진학하지 못해, 세상에다 대고 억울하다고 외치기도 했던 시간도 있었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힘들어 집을 뛰쳐나가려다 아무것도 모르고 쌔근쌔근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주저앉아서 울기도 했고,
첫아이 키워놓고 들어간 직장에서는 이런저런 구설수에 휘들려 상처처 받고 사람을 절대 믿지 말자며, 굳은 다짐을 하고도 몇 시간 지나면 다 까먹어 자존심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직장생활도 잘 견디어 냈다.
출발도 늦었고, 비빌 언덕도 없던 내가, 은수저 이상인 사람들을 따라 가려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많이 했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늘 그 자리에서 뱅뱅 돌면서 말이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맞이한 지금은 모든 것이 재미있고 즐겁다. 갑자기 웬 도인이 된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일까? 아니면 도전할 의욕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쨌든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미있다.
사각의 프레임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며, 사진을 찍는 것도 재미있고, 젊은 날에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지혜(라테는 말이야..)를 얻어가는것도 재미있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뇌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컴퓨터 앉아 서류 작업하는 것도 소중하게 느껴지며 재미있다. 오후가 되면 A4용지속의 글자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며 달아나 그 글자들을 찾아 조합하느라 힘이 들지만 말이다.
밥상을 차릴 때 구색을 맞추기 위해, 5대 영양소를 맞추어가며 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단품의 밥상을 차리면서도, 그 단품의 음식으로 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하다.
말이 없는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이젠 좋다. 젊었을 때는 왜 " 말 좀 해봐"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까. 그래도 가끔은 손주들 이야기는 한다. 손주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손주들 크는 과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자식과의 연관성을 찾아내며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주 가끔은 뜬금없이 밥알이 다 튀어나가도록 정치인들을 비방하는 남편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말없는 사람이 밥알까지 튀기면 이야기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정치를 못하나 보다.
젊은 날에는 하루하루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하기야 모든 것에 미숙하고 이루어야 할 것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저 많은걸 언제 다 이루나... 하는 욕심이 많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등바등해서 얻어지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은 삶에 대해 느긋하게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다.
어머니가 늘 그러셨다. 억지로 안된다고. 돈 버는 것도 억지로 안되고, 자식 키우는 것도 억지로 안되고, 다 억지로 안된다고. 어머니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아마 나는 더 일찍 재미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살아보니 인생은 갈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