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도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자마자 얼어버려 제설작업을 할 수도 없었다. 금방 얼어버린 눈은 걸어다니기는 편했다. 그런날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그해 겨울은 다른해의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난방 시절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주택이었는데다가, 옷도 변변치 못한 걸 걸쳤으니, 더 추위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드름이 처마 밑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막대기로 고드름을 툭툭 쳐서 떨어뜨린 후 마당으로 나오곤 했다.
추운 겨우내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갇혀 살았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다. 처마 및 고드름이 봄볕에 똑똑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방안에도 봄볕이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집 주변의 공터와 울타리 주변으로 봄의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새싹들과 함께 담 밑에 앉아 따사로운 봄볕을 쬐고 있었다. 봄볕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집에만 있지 말고 어디로든 나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갔다.
전단지를 붙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나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용하다는 점쟁이는 다 찾아다니셨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멍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집을 나간지 6개월이 지났다. 겨울이 추우면 여름도 더운지 땡볕이 머리 위에 내리쬐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무더운 여름날의 연속이었다.
밭에서는 옥수수와 고추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을걷이만 남았다. 가을 걷이 후 남편은 군입대를 해야 했다. 더 미룰 수도 없다.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모님에게 알려야만 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가출에 대한 변명서였다.
마당에는 잘 익은 고추를 널어 놓았다. 고추들은 8월의 붉은 볕을 받아 빠르게 말라가고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졸졸 흘러 내러 가고 있었다. 흐르는 물에는 김치통, 수박, 참외가 담겨 있었다. 마당의 꽃밭에서는 노란 키다리들이 더위에 축축 처져 넘어지기 직전이었고,
부엌에서는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갑자기 마당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며 시끄러워졌다. 어머니와 나는 뛰쳐나갔다.
아버님이 누구시냐 물었다. 쳐들어온 사람은 대답도 없이 집안을 살폈다.
아버님이 다시 무슨 일로 오셨냐며 물었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사방공사에 불려 나갔던 신랑이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시골에는 명절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길가의 잡초를 제거하거나, 망가진 도로를 보수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 차출하여 공동으로 작업을 했다. 마을 부역이었다.
보통 마을 부역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신랑은 집안의 대표로 마을 부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부역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저녁이나 되어야 끝났다. 그런데 부역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 들어온 것이다.
신랑은 동네 개울가에서 부역에 나온 사람들과 제방을 쌓고 있었다. 택시가 와서 멈추고, 여기 000집이 어디냐며, 낯선 사람이 물었다. 택시에 탄 낯선 사람이 000의 집을 찾으니, 신랑은 느낌으로 장인어른이구나 알아 차리고 택시를 뒤따라 달려왔던 것이다.
조용하던 집안에 낯선 사람이 찾아와 이유도 없이 집안을 살피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던 어머니와 나는 소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아뿔싸!! 그 주인공은 나의 친정아버지셨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뒤돌아섰다. 지금의 내 상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나의 아버지인지 눈치를 채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시부모님은 처음으로 사돈을 본인의 마당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심지어 신랑도 처음 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사돈이라는 것을 아신 부모님께서는 바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방으로 안내를 했다. 어려운 사이인 사돈의 면전임에도 아버지는 다른 사람은 다 필요 없다 시며, 내 딸만 보고 가겠다며 나에게로 다가오셨다.
나를 보시자마자 아버지는 그 자리에주저앉으셨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아버지는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와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면서 고개를 좌우로 하늘을 쳐다보며, 아무리 쳐다봐도 산과 하늘뿐인 이런 두메산골을 어떻게 알고 왔느냐면서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대추나무에서는 매미들이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정을 감지도 못한 채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시부모님께서는 친정아버지에게 사랑방으로 드시라며 권유했다. 마지못해 아버지는 댓돌 위에 구두를 벗어 놓고 사랑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밖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죄인처럼 서있는 나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여름 내내 묵혀 두었던 사랑방은 곰팡내가 났다. 사랑방에는 조립식 옷장과 임신과 출산이라는 책이 올려져 있는 다리 짧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두메산골까지 온 자초지종을 듣고자 아버지는 몇 번을 물었다. 하지만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부엌에서 어머님이 밥상을 차려 들어오셨다. 밥상에는 밥 2공기와 막 따다 볶은 호박, 계란 후란이, 오이냉채와 숟가락 2개가 올려져 있었다.
어머님은 아버지와 내가 겸상을 하도록 밥상을 차리신 거였다. 어머님이 밥이라도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라고 말씀하시자, 아버지는 밥은 필요 없다면서 둘만 있게 해달고 말씀하셨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는 내가 무슨 이야라도 하길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끔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는 만큼 나는 더 죄인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온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차려온 밥상에 손도 대지 않고 한숨만 쉬고 계시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만 가야겠다고 했다.
밖에서 방의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시던 시부모님이 밥이라도 드시고 가라고 거듭 말씀드렸지만, 그 말은 허공의 메아리나 다름없었다.
시부모님, 신랑, 나, 이렇게 배웅을 하려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부모님 집은 정기적인 버스 노선이 아예 없는 산골이었기 때문에 시아버님께서는 빨리 택시를 부르라고 하셨다.
신랑은 내달려 전화가 있는 이장 집으로 갔다. 이장댁은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친정아버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떤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며, 두 분은 들어가시고, 이 아이만 남겨 달라고 했다.
둘만 남겨지자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시더니 무언가를 말할 듯 말듯 하시면서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는 나는 간다..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셨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길가에 서있는 나무를 휘휘 감고 한창 익어가는 으름이 눈에 띄었다. 잘 익은 으름을 하나 따서 입에 넣었다. 으름의 달착지근한 맛은 없고 눈물이 들어가 짠맛이 났다.
친정아버지의 등장으로 사태를 파악하신 시부모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부모님과 남편이 따온 고추를 마당에 널고, 참을 만들어서 밭으로 내가고... 산골의 생활은 아무렇지 않게 평온하게 흘러갔다. 뒤도 돌아보지않고 가신 아버지의 근황이 궁금해졌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두툼한 편지 1통이 배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