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아의 집 밖(밤)
경호가 차에 앉아서 인아의 집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민철이 걸어와 인아의 집으로 들어간다.
# 인아의 집
식탁에 인아와 선아, 부모님, 민철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아빠 (약간 취기 섞인 말투로) 이봐, 한 서방.
민철 예, 장인어른
아빠 인아가 내 딸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자네 정말 장가 잘 가는 걸세.
민철 예, 저도 잘 압니다. 장인어른.
아빠 왜 자네가 내 딸과 결혼하면 장가를 잘 거는 거냐, 그건 내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내를 가리키며) 내 아내, 홍숙자의 딸이기 때문이야. (집 내부를 가리키며) 이 집을 보라고, 이 집을. 아니, 군인이 옷 벗고 이 정도의 집에 산다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 아닌가?
민철 예, 맞습니다. 장인어른.
아빠 이게 다 여기 계시는 내 아내, 홍숙자 씨 덕분이라 이거야. 그거 아나? 내 아내는 내가 별까지 달거라 생각을 안 했다네. 아마 아내 생각은 내가 대령도 가기 전에 전역할 거라 생각했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별 셋까지 달고 전역했단 말이지. 무궁화 셋도 못 달 것 같던 남자가 별 셋이나 단 것 또한 이 옆에 계신 홍숙자 씨 덕분이지. 아무튼, 내가 50대에 전역할 것 같으니까, 그 뒤에는 손가락 빨고 살까 걱정돼서 이것저것 다한 거지.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종잣돈을 모아 부동산 투자를 했나 봐. 나는 몰랐어. 혼자서 따라다니며 경매, 공매, 갭투자 같은 걸 배우고 했나 보더라고. 덕분에 내가 이렇게 여유 있는 은퇴 후의 삶을 누리는 거라고. (인아를 가리키며) 인아가 바로 그런 홍숙자 씨의 친딸이란 말이지. 피는 못 속여. 그러니 필시 인아도 자네에게 큰 보탬이 될 걸세. 내 말 무슨 뜻인지 아나?
민철 예, 장인어른, 무슨 말인지 잘 압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아 아빠 취하셨어요.
아내 당신은 사위를 앞에 앉혀 놓고 별소리를 다해요.
아빠 아니, 난 안 취했어. 이건 내 진심이야. 난 평생 당신에게 감사하며 살았어. 나 서충식이는 정말 결혼 잘 한 놈이야. 아내 복이 많은 사람이지. (술병을 드는데 술이 없다) 어, 술이 없네. 선아야, 가서 술 좀 사 올래?
선아 네, 아빠. (자리에서 일어난다)
민철 아이, 처제, 앉아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선아 아네요, 형부 제가 갔다 올게요.
민철 그래, 그럼 같이 가자고, 이 밤에 예쁜 처제를 혼자 보낼 수 없지.
선아와 민철이 현관으로 걸어간다.
# 인아 집 앞
집에서 나오는 민철과 선아
선아 (민철에게 팔짱을 끼며) 형부.
민철 어? 왜, 처제.
선아 울 언니의 어떤 면이 좋았어요?
민철 많지. 셀 수도 없이 많지.
차 안에서 이를 지켜보는 경호.
과거에 학교에서 선아가 민철의 팔짱 꼈던 게 생각난다.
핸들을 꾹 쥐고 한 손으로 내려친다.
# 같은 장소
민철이 나와 걸어간다.
차에서 내리는 경호. 민철에게 다가간다.
민철의 어깨를 잡는 경호
경호 저기요.
민철 (돌아본다) 무슨 일이죠?
경호 (민철의 어깨를 툭 치며)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당신이 누군데 선아랑 팔짱을 끼고 다녀? 남자 친구라도 돼? 딱 봐도 나이 차이가 엄청 나게 생겼구먼.
민철 (피식 웃는다)
경호 (흥분해서) 웃어? (주먹을 날리는데 민철이 피한다) 어쭈 피했어.
경호가 주먹을 날리는데 민철이 그 힘을 받아 바닥에 쓰러뜨린다.
민철 (경호를 제압하고) 뭔가 착각이 있나 본데, 나 선아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형부야. 그런 자네는 누구지? 누군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주먹질이야?
경호 (고통스러워한다)
# 인근 공터
민철과 경호가 벤치에 앉아 있다. 민철은 캔맥주를 경호는 캔커피를 손에 들고 있다.
민철 자네, 우리 처제 좋아하나?
경호 (겸손하게) 네.
민철 그런데 처제가 자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단 말이지?
경호 예.
민철 음~~~~~~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하더니) 내 생각에는 말이야~~~~~~
# 경호 집
과외를 마치고 내려오는 선아. 경호는 기다렸다 선아에게 다가간다. 대문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선아가 대문을 열려고 한다.
경호 선아야,
선아 엉? 왜?
경호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선아 어, 말해.
경호 네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나 생각해 봤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 그러다 알아냈어. 네가 날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선아 그, 그건 맞아. 난 네가 부담스러워.
경호 근데, 그 부담이라는 게 내 배경 때문이라면 다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선아 그게 무슨 말이야?
경호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데, 내 배경 때문에 망설이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는 거지. 만일, 만일, 네가 날 부담스러워하고 자꾸 밀어내는 이유가 네 언니 때문이라면
선아가 경호의 뺨을 때린다.
놀란 경호, 경호를 바라보는 성난 선아.
선아 너, 이것밖에 안 되는 애였니?
경호 선아야.
선아 그래, 돈이면 안 될 게 없지, 사람 뒷조사나 하고, 넌 참 몹쓸 애구나. 난 적어도 넌 다를 거라 생각했어. 신문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고위층 자녀들과는 다를 줄 알았다고. 또 그래 보였고. 그런데 너도 똑같아. 구역질이 나려고 해. 그 세계에 살면 누구나 그렇게 변하는 거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나 이제 너랑 끝이야. 다신 이 집에 오지도 않을 거고. 너랑 얼굴 마주치지도 않을 거도 대화도 안 할 거야. 앞으로 나한테 다가오면 너 내가 가만 안 둔다. 너랑 오늘부로 절교야.
선아가 문을 열려고 한다.
경호 뒷조사 한 거 아니야. 네 형부가 알려줬어.
선아 (놀라 돌아본다) 뭐? 우리 형부가?
경호 그래. 네 형부가.
선아 너, 울 형부 만났니?
경호 며칠 전 저녁에 네 집에 찾아갔었어. 그때 거기서 네 형부를 만나 이야기했어.
# 민철의 집 거실
민철과 인아가 노트북을 함께 보며 뭔가를 검색하고 있다.
인아의 스마트 폰 밸리 울린다.
인아 어, 선아야~~~ 나? 지금 오빠 집에 오빠랑 같이 있는데, 왜?~~~~~~아, 그래. 오늘 좀 늦을 거야.
민철 (인아를 보고 No라는 손짓을 한다)
인아 (웃으며) 안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런데 왜?~~~ 어, 그래 알았어.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민철 처제야?
인아 예.
민철 무슨 일이래?
인아 아, 그냥 해봤데요.
민철 그래
# 같은 장소 (시간의 경과)
초인종이 울린다. 인아가 인터폰 쪽으로 걸어가 액정 화면을 본다. 선아다.
문이 열리고 선아가 들어온다. 흥분한 모습이다.
인아 선아야, 무슨 일이야?
선아 형부는?
민철 (거실에서 웃으며 걸어온다) 어휴, 처제. 이렇게 누추한 곳에 웬일로.
선아 (민철을 노려보며) 형부가 제 친구 만나서 말해줬어요?
민철 친구? 누구?
선아 며칠 전에 제 친구 경호 만나서 이상한 얘기 해줬냐고요.
민철 어, 만났어. 왜? 무슨 이상한 얘기?
선아 제가 언니의 이혼 때문에 그 애를 거부한다고 말해줬냐고요.
민철 (당황스러운 듯) 어.
선아 형부가 왜요? 형부가 왜 그 애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셨는데요? 잘 아시지도 못하면서.
인아 선아야!
선아 언니, 형부가 글세 경호를 만나서 내가 싫어하는 이유가 언니 이혼 때문이라고 했대. 기가 차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닌 형부가 처제 친구에게 그런 소리를 하고 말이야. 안 그래?
인아 선아야! 너야말로 왜 이러는데, 너답지 않게. 갑자기 이 밤에 찾아와서 뭐니 형부 될 사람에게 이게 뭐니 예의 없게. 얼른 형부에게 사과해.
선아 언니, 벌써부터 형부 편드는 거야? 이거 섭섭한데, 언니 아직 우리서 씨 집안사람이야. 아직 호적 판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벌써부터 한 씨 집안 행세야? 그래, 출가외인이라 이거지? 이제 우리 집 사람 아니라는 거네. 알았어. 못된 동생을 사라질게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 문을 닫고 나간다.
인아 예, 선아야.
민철 여기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신을 신고 나간다)
# 민철 집 근처
선아가 걸어가고 민철이 뒤를 따른다.
민철 (선아의 손목을 잡는다) 처제,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선아 (손을 뿌리친다) 놔요. 형부랑 할 얘기 없거든요.
민철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해. 들어보고 나서 나랑 언니를 볼지 안 볼지를 결정하라고.
선아 (말없이 민철을 본다)
# 카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커피가 놓여 있다.
민철 처제. 내가 그 친구에게 쉰소리를 해서 기분 나빴다면 내가 미안해.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줬음 해. 언니가 처제에게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실은 나. 지금은 어엿한 회사 대표지만, 한 때는 조직폭력배에 몸담고 있었어.
선아 (놀라 민철을 본다)
민철 그래, 언니가 말 안 했나 보네.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군 제대 하고 조폭에 들어가 몇 년 조폭 생활을 했지. 잠시 교도소에도 다녀왔고. 아, 물론 누명을 쓰고 들어갔기에 나중에 풀려났지만. 그때 조폭은 물론이고, 사기꾼, 강간범, 절도범, 강도. 이 세상의 아주 못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지인지감이랄까.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생기더라고. 그러니까 말이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감이 와.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인지 아닌지를 말이야. 그게 사업할 때 큰 도움이 되더라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사람한테 뒤통수 맞은 일은 없거든. 아직까지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그 친구를 만나 이야기해보니. 사람이 맑아. 선해. 뭐 그 친구의 환경이나 배경을 떠나, 사람이 좋더라고. '아, 이 친구는 처제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내가 얘기해 준 거야. 두 사람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데 만약에 나중에, 나중에 말이야. 혹시라도 그 친구가 처제에게 상처를 줬다? 내가 가만히 안 두지. 철저하게 응징을 하지. 감히 내 처제에게 상처를 줬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려고. 말도 안 되지. 그러니 처제, 내 말을 믿고 한 번 그 친구랑 만나보는 건 어때?
선아 (말없이 민철을 바라본다)
# 민철의 집
민철이 들어온다. 인아가 서 있다.
민철 (신을 벗으며) 미안해. 기분 나빴지?
인아 네? 뭐가요?
민철 내가 처제 친구에게 인아 과거 이야기 해서 기분 나빴지?
인아 음, 아니,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선아가 내 과거 때문에 그 친구를 밀어낸다고 생각은 했었으니까.
민철 그래. 그래도 미안해. 내가 인아 과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인아 오빠 마음 이해하니까 됐어요.
민철 그래, 그렇다면 나야 고맙고. (다가가 인아를 안는다)
# 대학 강의실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이 일어선다. 선아가 가방을 챙겨 일어나 출구를 향하는데 경호가 앉아 있다.
선아와 눈이 마주치자 경호가 얼른 고개를 숙인다. 경호에게 다가가는 선아. 경호 앞에 선다.
경호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선아를 본다)
선아 나랑 얘기 좀 해.
# 건물 뒤편 한적한 곳.
선아와 경호가 거리를 둔 채 서 있다. 경호는 바닥을 보고 있고, 선아는 멀리 시선을 두고 있다.
경호 내가 미안해. 선아야. 내가 잘못했어.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면 미안해. 그럴 뜻이 아니었는데, 난 그냥 너랑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런데, 선아야. 우리 다시 전처럼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내 동생 과외는 안 해도 돼. 나도 더 이상 너 귀찮게 안 할게.
선아 (뒤돌아 경호를 본다) 경호야.
경호 어? 왜?
선아 (경호에게 다가간다) 네 말이 맞아.
경호 어? 뭐가?
선아 아니, 형부의 말이 맞겠구나. 그동안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널 거부했던 이유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
경호 그래?
선아 언니가 좋은 집안에 시집갔는데, 잘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걸 보니, 아, 그런 집안의 남자 만나면 무시당하고 상처만 받고 버려지는구나. 그럼 난 우리보다 대단한 집안의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지. 사귀지 말아야지. 뭐 그런 인식이 박혔었나 봐. 그런데 그런 네가 날 좋아하니까 방어기제라고 해야 하나. 너한테 마음을 주면 이 애는 나를 데리고 놀다가 날 차버리겠지. 그럼 맘 주면 안 되겠네. 뭐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
경호 아냐, 난 절대로 그렇지 않아.
선아 그래, 너 말고 그런 집안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생각은 했어. 그런데, 경호는 다른 것 같다. 뭔가 모르게 그런 집안의 사람과는 다른 것 같다. 순수하고 착하고. 그런데 그게 가식일까? 연기일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내가 마음을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할까?
경호 아니. 난 너 앞에서 가식을 부리거나 연기한 적 없어. 이게 진짜 내 모습이라고. 그러니 변할 이유도 없지.
선아 어제 내가 화가 났던 건, 네가 함부로 나와 언니의 아픈 부분을 스스럼없이 말했기 때문이야. 남의 상처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고.
경호 그건 내가 정말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선아 그래. 용서해 줄게. 다음에는 그러지 마.
경호 (의아한 표정으로 선아를 본다) 그럼, 우리 다시 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선아 응! 그런 셈이지.
경호 그래?
선아 경호야.
경호 어? 왜?
선아 아니, 그냥. 네가 날 노리개 감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경호 난 너를 한 번도 노리갯감으로 생각한 적 없거든.
선아 만일 그렇다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경호를 본다)
경호 (침을 삼키고) 만일 그렇다면?
선아 한 번 나랑 사귀어 보자고.
경호 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선아 못 들었어? 다시 이야기해 줘?
경호 어. 잘 못 들었어.
선아 니캉내캉! 한 번 잘 사귀어 보자고.
경호 어? 정말? 그럼 오늘부터
선아 오늘부터 난 너의 여사친이 아니라 여자친구고, 넌 나의 남사친이 아니라 남자친구지. 연인 사이.
경호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선아 (다가와 경호의 왼쪽 뺨을 어루만진다) 어제 많이 아팠지? 미안.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만.
경호 아니, 전혀. 괜찮아. 내가 맞을 짓을 했잖아.
선아 아니, 세상에 맞을 짓은 없어. 화가 났어도 내가 널 때린 건 내가 잘못한 거야. 그리고 너! 앞으로는 지금처럼 내 앞에서 기죽어 있지 마. 알았어? 이제 너랑 나랑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는 거니까. 나도 너한테 기죽지 않을 거니까, 너도 나한테 기죽지 마. 당당해지라고. 알았어?
경호 어, 알았어.
선아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오늘은 내가 밥 살게. 가자. (경호의 손을 잡는다)
경호 (잡힌 손을 보고 좋아서) 어, 그래.
두 사람이 손 잡고 학교 정문으로 걸어간다.
선아 (독백) 그래, 이게 복인지 저주인지는 한 번 부딪쳐 보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