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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민비·진령군, 반정

[이야기] 뉴스 보며 떠오른 역사적 사례들

by 최경식


최근 뉴스 등을 보면서 역사적 사례를 떠올릴 때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정리해 봤다.


1. 무신정권

고려 중기에 이르렀을 때 '무신정변'이 발생했다. 그동안 문신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정제되지 못하고 거칠었던 무신 세력은 '힘'으로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기존에는 그나마 조정에서 대화가 우선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무신집권기에는 대화보단 '검'(劍)이 우선이었다. (경대승과 최충헌은 다소 예외인 측면이 있었다.) 문신 정치인들과 백성들은 언제나 무신들의 검에 목이 베일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사상 유례가 없는 기괴한 집권 세력의 등장으로 고려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많은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이 고려 몰락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2. 민비·진령군

‘진령군’.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 이름은 조선 후기 국가의 존망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한 무녀의 군호다. 1882년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당시 왕이었던 고종과 민비는 이를 피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장호원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민비는 무당인 박창렬을 만났는데, 그는 침체돼 있던 민비에게 환궁을 예언하며 힘을 북돋워 줬다. 결국 박창렬의 말대로 환궁이 이뤄졌을 때 민비는 그와 동행했고 ‘진실로 영험하다’라는 의미의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군호는 아무나 받을 수 없었다. 신료의 경우 당파를 이끄는 수장으로 활동하며 군주의 신임까지 확보해야 군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일개 천민의 신분인 무당이, 그것도 여성으로서 군호를 받은 인물은 조선 역사상 진령군이 유일하다.


민비는 진령군을 ‘언니’라 부르며 궁궐에서 함께 살았다. 이후 조정의 모든 권력은 진령군에게 집중됐다. 그의 감언이설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민비와 고종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진령군에게 의존했다. 사실상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진령군은 틈만 나면 궁궐에서 굿판을 벌였고 각종 전횡을 일삼았다. 사치도 대단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이 어렵게 확보했던 조선의 국고는 단기간에 탕진됐다. 진령군은 1894년 갑오경장 때 붙잡혀 사형에 처해졌지만 이미 조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있었다. 그 결과는 '망국'이었다.


3. 중종반정

1506년 '연산군'의 광기 어린 폭정에 신하들 및 백성들의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무수한 피의 숙청을 불러온 두 번의 '사화'(士禍)와 사치 및 향락으로 세종, 성종 때 일군 조선의 정치·사회적 발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훈구파'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발생했다. 역사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른다.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는 그릇된 상태에 있는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산군이라는 잘못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중종)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신료들에 의한 군왕의 교체, 조선사 최초의 '탄핵'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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