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이야기] 정사 너머의 역사

by 최경식

우리는 대체로 정통적인 역사 체계에 의해 서술된 역사만을 배운다. 소위 '정사'(正史)라고 불리는 역사에 집중하는 경향성이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예로부터 전해진 사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이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다른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사를 무비판적으로,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의 다양성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라는 것에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석연치 않은 부분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밝히기를 꺼리는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수도 있다. 또는 '승자'들의 관점만을 기초로 해서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기록했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한 세력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그 세력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전임자와 그 추종 세력을 곡해하거나 격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가능성들을 아예 배제하고 석연치 않은 역사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해당 역사의 전후 맥락과 일부 근거들을 중심으로 합리적으로 '추정'해보고, 항간에서 기록한 역사서인 야사와 민담 등을 살펴보는 것도 역사를 탐구해 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상술한 내용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례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대표적으로 '궁예'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인 <태조 왕건>을 통해 궁예를 강렬하게 접했다. 드라마에서 궁예는 초기에 성군적인 면모가 다분했지만, 어느 순간 미치광이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역사서에도 궁예가 폭군으로 묘사돼 있다. 결국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맞아 죽는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살아있는 부처로까지 추앙받았던 사람이 일순간 미치광이 폭군이 되는, 극과 극을 오가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다른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궁예의 왕권강화 노력 및 호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고, 여기서 궁예가 패배해 왕위에서 쫓겨남에 따라 역사에서 평가절하됐을 가능성이다.


특히 궁예가 901년 황해도 송악을 도읍으로 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가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호와 수도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궁예는 한강 하구와 인접한 요충지인 송악을 버리고, 굳이 물길이 희박하고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는 철원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송악에 비해 상당히 열악한 입지를 갖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가 철원을 택한 이면에는 황해도 호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원 천도 직전에 설치했던 '광평성'에서도 이와 관련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적'인 호족 세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 벗어나, 궁예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 기반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해 이른바 '새판 짜기'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궁예와 달리 기득권 세력인 황해도 호족 등에게는 철원 천도가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자신들의 근거지가 수도에서 멀어지면서 이전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권이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궁예가 철원에 궁궐을 지으면서 호족 세력이 소유한 자금과 노동력 등을 대거 징발함에 따라 궁예에 대한 호족 세력의 반감은 극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강하게 표방했던 고구려 계승 및 '북진'(北進) 정책 기조도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호족들에게는 부담이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궁예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호족 세력의 기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관심법'도 왕권 강화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자 전략으로 동원된 측면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호족 세력은 궁예의 정책 기조를 견디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진 왕건을 앞세워 '권력 찬탈'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있다. 잠재적 대권 주자였던 왕건은 황해도 송악에 기반을 둔 호족이었다. 궁예가 죽였다고 하는 왕비 강씨 역시 황해도 신천의 호족 딸이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호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아울러 권력 찬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임자인 궁예를 '인격 말살'시키는 비정한 조치를 행했을 수 있다.


궁예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례들도 존재한다. 군왕들의 이상한 죽음이다. 특히 조선 후기 개혁의 정점에서 발생한 정조대왕의 급서는 극심한 의혹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기록에 나와있는 몇 가지 단서들에 기반해 '정조 암살설'이 강하게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암살설을 기정사실화 할 만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정사 너머에' 존재하는 역사들이다. 기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게 조심스럽기도 하다. 사료에 나와있는 표면적인 내용만을 중시하는 이들이 주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자칫 "소설을 쓴다"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것이 창의적 사고의 발현과 역사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술했듯 생각의 다양성을 품고 합리적 추정을 해본다면, 석연치 않은 역사의 실타래가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깎아내리는 작업이 아니라,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가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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