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독서] 임마누엘 칸트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인간 인식의 근원적 통찰"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은 그 자체로 계몽철학이다. 코페르니쿠스-갈릴레이-뉴턴이 과학에서, 로크-루소-볼테르가 정치 사회 이론에서 계몽 정신을 시현했다면, 칸트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본령인 형이상학에서 그것을 시현했다. "계몽의 시대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요, 모든 것은 비판에 부쳐져야 한다." "이성은 오직, 그의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견뎌낸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허용한다." 이와 같이 칸트의 계몽철학은 이성비판으로부터 발걸음을 내딛는다. 순수한 개념 체계인 철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성은 오로지 '순수한' 이성이다. 그래서 칸트의 첫 작업은 '순수이성비판'이다. 그것은 '순수 이성의 원천과 한계'를 분별하는 일로, 이로써 이성은 "이성에 대해, 이성이 하는 업무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 자기 인식의 일에 새로이 착수하고,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여,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에 근거 없는 모든 월권에 대해서는 강권적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인 법칙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법정의 심판대에 이성 자신과 더불어 첫 번째로 세워지는 피고는 다름 아니라 '순수한 이성의 이론적 체계'인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이 과연 엄밀한 이성 인식의 체계인가를 변별하는 이 작업이야말로 "이제는 더 이상 사이비 지식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려는 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것은 철학적 문제 영역에 있어서의 계몽주의의 첫째 과제이자, 또한 칸트 비판철학의 근본 과제이다. -책 본문 中
#. [초월적 감성학] 인식이 직접적으로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고 모든 사고가 수단으로 목표하는 것은 직관이다. 우리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으로 표상들을 얻는 능력(수용성)을 일컬어 감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감성을 매개로 대상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성에 의해 사고되며, 지성으로부터 개념들이 생겨난다.
감각에 의해 대상과 관계 맺는 그런 직관은 경험적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경험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일컫는다.
나는 그 안에서 감각에 속하는 것을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 그런 모든 표상을 (초월적 의미에서) 순수하다고 부른다. 그러니까 감성적 직관들 일반의 순수 형식은 마음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현상들의 모든 잡다는 일정한 관계에서 직관되는 것이다. 감성의 이 순수한 형식 그 자신도 순수한 직관이라고 일컬어진다. 모든 선험적 감성 원리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부른다.
#. [공간에 대하여] 내적 규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시간 관계에서 표상된다. 시간은 외적으로는 직관될 수 없다. 그러면 공간과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먼저 공간 개념을 해설하고자 한다. 그 해설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개념을 서술하는 것을 포함하면, 그 해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공간은 외적 경험들로부터 추출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이라는 표상은 경험을 통해 외적 현상의 관계들로부터 얻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외적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오로지 이 표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표상이다. 공간이 없다는 것은 결코 표상할 수 없다. 그것은 외적 현상들의 기초에 반드시 놓여 있는 선험적인 표상이다.
기하학은 공간의 속성들을 종합적으로 그리고 그것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학문이다. 공간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려면, 도대체 공간 표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근원적으로 직관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전한 개념으로부터는 그 개념을 넘어서는 어떤 명제도 도출되지 않는데, 기하학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직관은 선험적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한 모든 지각에 앞서 우리 안에서 만나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순수한, 경험적이 아닌 직관이어야만 한다.
공간은 다름 아니라 외감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공간은 그 아래에서만 우리에게 외적 직관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다.
#. [시간에 대하여] 오로지 시간을 전제하고서만 우리는 몇몇의 것이 동일한 시간에 또는 서로 다른 시간에 잇따라 있음을 표상할 수 있다. 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표상이다. 시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시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선험적 필연성 위에 시간 관계들의 명증한 원칙들 내지 시간 일반의 공리들의 가능성 또한 기초한다. 시간은 오로지 하나의 차원을 갖는다.
시간은 다름 아닌 내감의 형식,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규정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형태나 위치 따위에 속하지 않으며,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시간은 모든 현상들 일반의 선험적 조건이다. (우리 영혼의) 내적 현상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바로 그렇기에 간접적으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모든 현상들 일반은, 다시 말해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상에 있고, 반드시 시간 관계들에 서 있다'라고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시간에서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빼낸다면, 시간이라는 개념 또한 사라질 것이다. 시간은 대상들 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순수 수학이 공간 및 그것의 관계들의 인식과 관련해 빛나는 예를 보여 주듯이, 그로부터 여러 종합적 인식들을 선험적으로 길어낼 수 있는 두 인식 원천이다. 그것들은 모든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이고, 그로써 선험적 종합 명제들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이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그 사물들을 그런 것이라고 직관하는 그 자체가 아니며, 그것들의 관계들도 그 자체로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그대로가 아니며, 또 우리가 우리 주관이나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을 제거한다면, 공간 시간상의 객관들의 모든 관계들, 그리고 심지어는 공간 시간조차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 방식의 순수 형식들이고, 감각 일반은 그 질료이다. 전자를 우리는 오로지 선험적으로 다시 말해 모든 현실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하므로 그것을 순수 직관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후자는 우리 인식에서 후험적 인식, 다시 말해 경험적 직관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이루는 그런 것이다.
#. [논리학 일반에 대하여] 우리 인식은 마음의 두 원천으로부터 유래한다. 첫 번째 원천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 번째 원천은 이 표상들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개념들의 자발성)이다. 전자에 의해 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후자에 의해 이 대상이 (마음의 순전한 규정인) 저 표상과 관련하여 사고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에 반해 표상들을 스스로 산출하는 능력, 바꿔 말해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우리의 자연본성상, 직관은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직관은 오로지 우리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만을 갖는다. 이에 반해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감성이 없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터이고, 지성이 없다면 아무런 대상도 사고되지 않을 터이다.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들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 이 양자가 통일됨으로써만, 인식은 생길 수 있다.
일반 논리학은 무릇 순수 논리학이거나 응용 논리학이다. 순수 논리학은 순정한 선험적 원리들만을 취급하는 것이고, 이성과 지성의 규준이다. 주관적인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의 지성사용의 규칙들에 지향되어 있다면, 그것은 응용 논리학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경험적 원리들을 갖는다.
순수한 직관도 아니고 경험적 직관도 아닌, 순수 사고의 작용들, 그러니까 경험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않는 근원을 갖는 개념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우리는 미리 그에 의해 우리가 대상들을 온전히 선험적으로 사고하는 순수 지성 인식과 순수 이성 인식의 한 학문 이념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들의 근원과 범위와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그러한 학문은 초월 논리학이라고 일컬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법칙들만을 다루고, 그것도 오로지 이 법칙들이 대상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는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니까 경험적 인식이든 순수한 이성 인식이든 구별 없이 관계하는 일반 논리학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 [초월 논리학을 초월적 분석학과 변증학으로 구분함에 대하여] 초월 논리학에서 우리는 지성을 격리하고, 우리의 인식에서 오로지 그것의 근원을 지성 안에 두고 있는 사고 부문만을 들춰낸다. 그러나 이 순수 인식의 사용은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이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진다는 조건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직관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인식에는 객관들이 결여되는 것이고, 그러면 인식은 완전히 공허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초월 논리학의 부문은 초월적 분석학이고,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지성은 공허한 말로 꾸며대 순수한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리들을 질료적(실질적)으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도 않고, 아니 어쩌면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주어질 수도 없는 대상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으로 판단하는 위험에 빠진다. 만약 사람들이 초월적 분석학을 보편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기관으로 써서, 감히 순수한 지성만으로써 대상들 일반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주장하고, 결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순수 지성의 사용은 변증적이 될 터이다. 그래서 초월 논리학의 제2부문은 초월적 변증학이라 일컫는다.
초월적 분석학은 우리의 선험적인 전체 인식을 순수 지성 인식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개념들은 순수한, 경험적이 아닌 개념들이다. 개념들은 직관 및 감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지성에 속한다. 개념들의 표는 완벽하고, 그것들은 순수 지성의 전 영역을 완전히 아우른다.
순수 지성은 단지 모든 경험적인 것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모든 감성과도 완전히 구별된다. 그러므로 순수 지성은 그 자체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그 자체로 충분한 통일체이다. 순수 지성 인식의 총체는 한 이념 아래서 포괄되고 규정될 수 있는 한 체계를 이룰 것이고, 그 체계의 완벽성과 유기성은 동시에 포괄된 모든 인식 조각들의 정당성과 진정성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논리적 지성사용 일반에 대하여] 직관을 제외하고 나면, 개념들에 의한 것 외에는 다른 인식 방식이 없다. 지성 인식은 개념들에 의한 인식이고, 직관적이 아니라 논변적이다.
한 개념은 대상과 결코 직접적으로 관계 맺지 못하고, 대상에 대한 어떤 다른 표상과 관계 맺는다. 그러므로 판단은 한 대상에 대한 간접적인 인식, 그러니까 대상의 표상에 대한 표상이다. "모든 물체는 가분적이다"라는 판단에서, 가분성이라는 개념은 서로 다른 여러 개념들과 관계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체는, 그 아래에 다른 표상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표상들을 매개로 그것이 대상들과 관계 맺을 수 있음으로써만 개념이다.
나는 종합이라는 말을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러 표상들을 서로 덧붙이고 그 잡다함을 한 인식에서 파악하는 활동 작용으로 이해한다. 만약에 그 잡다가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주어진다면, 그러한 종합은 순수하다. 종합은 본래 인식을 위한 요소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일정한 내용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이 종합을 개념들에게로 가져가는 것, 그것은 지성에 속하는 기능이고, 이에 의해 우리는 비로소 본래적 의미에서의 인식을 얻는다. 여러 표상들은 분석적으로 한 개념 아래로 보내진다. 표상들의 순수 종합을 개념들에게로 가져가는 일은 초월 논리학이 가르쳐 준다.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위해 선험적으로 주어져야 할 첫째의 것은 순수한 직관의 잡다이다. 상상력에 의한 이 잡다의 종합이 둘째의 것이다. 이 순수한 종합에 통일성을 주며 오로지 필연적 종합적 통일의 표상에서 성립하는 개념들이 나타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위한 셋째의 일을 하며, 그것들은 지성에 의거하고 있다. 이것이 순수 지성개념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 [범주들의 표] 지성이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는, 종합의 근원적으로 순수한 모든 개념들의 목록이다. 지성은 오로지 이로 인해서 순수 지성인 것이다. 지성은 오로지 이것들에 의거해서만 직관의 잡다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말해 직관의 한 객관을 사고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선험적이고 순수한 사용만을 위해 정해져 있는 몇몇 개념들도 있는데, 이 개념들은 항상 그것의 권한에 대한 연역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 개념들이 어떤 경험에서도 얻어지지 않는 대상들에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선험적 개념이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그 개념의 초월적 연역이라 부른다.
모든 경험들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가 주어지는 감관의 직관 외에 또한 직관에 주어지는, 다시 말해 현상하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함유한다. 그러므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선험적인 조건으로서 모든 경험인식의 기초에 놓여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 개념인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모든 선험적 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은 우리의 전 탐구가 이끎을 받아야 할 원칙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곧 선험적인 개념들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조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근거를 제공하는 개념들은 필수적이다.
#. [대상들 일반에 대한 지성의 관계와 이것들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에 대하여] 경험 일반의 가능성 및 경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주관적인 세 인식 원천이 있는데, 그것은 감각기능(감관),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이것들 모두는 또한 이 경험적 사용까지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요소 내지는 토대이다. 감관은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지각에서 표상하며, 상상력은 연합(과 재생)에서, 통각은 이 재생된 표상들과 그로부터 이 표상들이 주어진 그 현상들과의 동일성에 대한 경험적 의식, 그러니까 인지에서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표상한다.
상상력에서의 잡다의 종합이 직관을 구별하지 않고 순전히 선험적인 잡다의 결합에만 관계할 때, 그것을 초월적이라 칭한다. 그리고 이 종합의 통일이 통각의 근원적 통일과 관계 맺어 선험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될 때, 그것을 초월적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통각의 이 근원적 통일은 모든 인식의 가능성의 기초에 놓여 있으므로, 상상력의 종합의 초월적 통일은 모든 가능한 인식의 순수 형식이고, 따라서 이것을 통해서 가능한 경험의 모든 대상들은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밖에 없다.
상상력의 종합과 관계 맺고 있는 통각의 통일이 지성이고, 그러니까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과 관계하는 통각의 통일은 순수 지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능한 현상들과 관련해서 상상력의 순수 종합의 필연적 통일을 함유하는 선험적 순수 인식들은 지성 중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범주들, 곧 순수 지성개념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적 인식력은 반드시 하나의 지성을 함유하고, 이 지성은 감각의 모든 대상들과 관계하고, 그러므로 일체의 현상들은 가능한 경험의 자료로서 이 지성 아래 종속한다. 결론은 순수 지성은 범주들을 매개로 하는 모든 경험들의 형식적 종합적 원리이고, 그래서 현상들은 지성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범주들이란, 현상들에게, 그러니까 모든 현상들의 총괄인 자연에게 선험적 법칙들을 지정하는 개념들이다. 법칙들은 현상들 안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의존하고 있는 주관이 지성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 주관과 관계해서만 실존하는 것이다. 현상들이란 그 자체로서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진 바 없이 있는 사물들의 표상일 따름이다.
감성적 직관의 잡다를 연결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이 상상력은 지성적 종합의 통일 작용에서는 지성에 의존하며, 포착의 잡다의 면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 포착의 종합 자신, 곧 이 경험적 종합은 선험적인 종합에 그러니까 범주들에 의존하므로, 모든 가능한 지각들은, 그러니까 또한 언제나 경험적 의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것은, 곧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면에서 범주들에 종속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범주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상도 사고할 수가 없고, 저 개념들에 대응하는 직관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고된 대상도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오직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선험적 의식도 가능하지가 않다.
#.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대하여] 지성 일반이 규칙들의 능력이라고 설명된다면, 판단력은 그런 규칙들 아래에 무엇인가를 포섭하는 능력, 다시 말해 무엇인가가 주어진 규칙 아래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이다. 지성은 규칙들을 통해 배우고 보강할 수 있는 것이지만, 판단력은 특수한 재능으로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단지 숙련될 수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판단력은 천부적 재능의 특수한 것으로, 그것의 결여는 어떤 교육도 메울 수가 없는 것이다.
#. [순수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들의 체계적 표상]
순수 지성의 모든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직관의 공리들 2. 지각의 예취들 3. 경험의 유추들 4.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
#. [1. 직관의 공리들] 모든 직관들은 연장적 크기들이다. 현상들은 일정한 공간 시간의 표상들이 산출되는 잡다의 종합, 다시 말해 동종적인 것의 합성과 이 동종적인 것인 잡다에 대한 종합적 통일 의식을 통하여 포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험적 의식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상들은 모두 크기들이며, 그것도 연장적 크기들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공간 또는 시간상의 직관들로서, 그에 의해 공간 시간 일반이 규정되는 바로 그 종합에 의해서 표상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장적 크기란, 그 위에서 부분들의 표상이 전체 표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크기를 일컫는다. 직관으로서의 모든 현상은 연장적 크기다. 모든 현상은 포착에서 오로지 (부분에서 부분으로의) 순차적 종합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들은 이 집합체(앞서 주어진 부분들의 일정 양)로서 직관된다. 이는 모든 종류의 크기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연장적인 것으로 표상되고 포착되는 크기들의 경우만 그렇다.
#. [2. 지각의 예취들] 모든 현상들에서 실재적인 것, 즉 감각의 대상인 것은 밀도적 크기, 다시 말해 도를 갖는다. 지각은 경험적 의식이다. 곧 그 안에 동시에 감각이 있는 그러한 의식이다.
무릇 감각 그 자체는 전혀 아무런 객관적 표상도 아니고, 감각 안에서는 공간에 대한 직관도 시간에 대한 직관도 발견되지 않으므로 감각에 연장적 크기가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종의 크기, 그러니까 밀도적 크기는 속한다. 이 밀도적 크기에 대응해서 지각의 모든 객체들에는, 감관에 미치는 영향의 도가 부여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의해 내가 경험적 인식에 속하는 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규정할 수 있는 인식 모두를 우리는 예취라고 일컬을 수 있다.
모든 현상들 일반은 연속적인 크기들(연속량)이다. 직관의 면에서는 연장적 크기들이고, 순전한 지각(감각과 그러니까 실재성)의 면에서는 밀도적 크기들이다. 만약 현상의 잡다의 종합이 단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많은 현상들의 집합으로, 원래 하나의 크기로서의 현상은 아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식의 생산적 종합의 순전한 계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꾸 중단되는 종합의 반복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무릇 연장적으로 고찰되든 밀도적으로 고찰되든 모든 현상들이 연속적인 크기들이라면, '모든 변화 또한 연속적이다'라는 명제는 여기서 쉽게 그리고 수학적 명증성을 가지고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변화 일반의 인과성이 전적으로 초월철학의 한계 밖에 있지 않고, 경험적 원리들을 전제한다면 말이다. 사물들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다시 말해 사물들을 어떤 주어진 상태의 반대로 규정하는 원인이 가능함에 대해서 지성은 우리에게 선험적으로는 전혀 아무런 설명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변성은 오로지 경험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현상들의 어떤 규정들과 상관되는 것이다.
어떻게 지성이 본디 순전히 경험적인 것, 곧 감각에 관계하는 것에서 현상들을 예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해결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질은 항상 경험적이고, 선험적으로는 결코 표상될 수가 없다.
내감에서의 경험적 의식은 0부터 더욱더 큰 도까지 올라갈 수가 있고, 그래서 직관의 동일한 연장적 크기가 많은 다른 것의 집합이 합해서 일으키는 만큼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한순간의 순전한 감각에서 0에서부터 주어진 경험적 의식에까지 같은 모양으로 올라가는 종합을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감각들이 그 자체로는 단지 후험적으로 주어지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도를 갖는다는 성질은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 [3. 경험의 유추들] 경험은 지각들의 필연적 연결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경험은 (감각)경험적 인식이다. 다시 말해 지각을 통해 객관을 규정하는 인식이다. 지각의 잡다의 종합적 통일이야말로 감관의 객관들의 인식, 다시 말해 (감관의 한낱 직관이나 감각이 아니라) 경험의 본질적인 것을 이룬다.
경험은 지각들에 의한 객관들의 인식이고, 따라서 잡다의 현존에서의 관계는 그 잡다가 시간상에서 모아진 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상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로 경험에서 표상되어야만 하지만 시간 자체는 지각될 수 없으므로, 시간상에서의 객관들의 실존 규정은 오로지 시간 일반에서의 그것들의 결합에 의해서만, 그러니까 오로지 선험적으로 연결시키는 개념들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다.
시간의 세 양태는 고정불변성, 계기(잇따름), 그리고 동시(적) 임이다. 따라서 현상들의 모든 시간 관계들의 세 규칙들이 모든 경험에 선행하며, 이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할 것이다. 세 유추들 모두의 일반 원칙은 각 시간에서 모든 가능한 경험적 의식(지각)과 관련해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의거한다.
경험의 유추는 오직 그에 따라 지각들로부터 경험의 통일이 (경험적 직관 일반으로서 지각 자체가 아니라) 생겨야만 하는 규칙일 따름이다. 그것은 (현상들의) 대상들에 대한 원칙으로서 구성적인 것이 아니라 규제적인 것으로 타당할 것이다.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은 (현상의 형식인) 순전한 직관, (현상의 질료인) 지각, 그리고 (이 지각들의 관계인) 경험의 종합에 함께 관련되는 것으로, 곧 그것들은 단지 규제적인 원칙들로서 구성적인 수학적인 원칙들과는 구별된다.
#. [제1유추. 실체 고정불변성의 원칙] 현상들의 모든 바뀜에서도 실체는 고정적이며, 실체의 양은 자연에서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만약 경험의 기초에 무엇인가 항상 있는 것, 다시 말해 불변존속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놓여 있지 않다면, 포착만으로는 이 잡다가, 경험의 대상으로서, 동시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잇따라 계기하는 것인지를 결코 규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시간 관계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에서만 가능하다.
고정불변적인 것이 없다면 시간관계는 없다. 시간 그 자체는 지각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상들에서 이 고정불변적인 것은 모든 시간 규정의 기체이며, 따라서 지각들의 모든 종합적 통일을, 다시 말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철학자는 이 세계에서 모든 변화에도 실체는 불변존속하며, 우유성(우연적인 것)들만이 바뀐다고 말함으로써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따름이다.
이제 이 고정불변성(개념)에 의거해서 변화 개념도 시정된다. 발생과 소멸은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의 변화들이 아니다. 변화란 똑같은 대상의 한 실존 방식에 뒤따라오는 또 다른 실존 방식이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모든 것은 불변존속적이고, 오로지 그것의 상태만이 바뀐다.
#. [제2유추. 인과성의 법칙에 따른 시간계기의 원칙] 모든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의 결합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현상들은 하나에 다른 것이 뒤따른다는 것을, 다시 말해 어느 때의 사물들의 한 상태는 앞선 상태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것을 나는 지각한다. 그래서 나는 원래 시간상의 두 지각들을 연결한다. 그런데 연결은 순전한 감관(감각기능)과 직관의 작품이 아니라, 이 경우 시간관계와 관련하여 내감을 규정하는 상상력의 종합 능력의 산물이다.
종합적 통일의 필연성을 동반하는 개념으로는 지각 중에는 놓여 있지 않은, 오로지 순수 지성개념만이 가능하며, 그것은 이 경우 원인과 결과의 관계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상들의 잇따름을, 즉 모든 변화를 인과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그것들에 대한 경험, 다시 말해 감각경험적 인식도 가능하다.
우리의 경우에 포착의 주관적 잇따름을 현상들의 객관적 잇따름으로부터 도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객관적 잇따름은 현상의 잡다의 질서(순서)에서 성립할 것이고, 이 순서에 따라 어떤 다른 것(선행하는 것)의 포착에 어떤 것(일어나는 것)의 포착이 하나의 규칙에 따라서 뒤따른다. 이러한 규칙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한 사건에 선행하는 것 중에는 그에 따라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 사건이 후속하는 한 규칙을 위한 조건이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한 사건으로부터 소급해 올라가 선행하는 것을 (포착을 통해) 규정할 수는 없다.
앞선 시간이 뒤따르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우리 감성의 필연적인 법칙, 그러니까 모든 지각들의 형식적 조건이라면, 과거 시간의 현상들이 후속하는 시간상의 현존재를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전자가 후자에게 시간상에서 그것의 현존을 규정해 주지 않는 한, 다시 말해 규칙에 따라 확정해 주지 않는 한, 후자는 사건들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 이것 또한 시간계열의 경험적 표상의 필수 법칙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에서만 우리는 시간들의 연관에서 이 연속성을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과 그것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지성이 필요하다.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계는 지각들의 계열에 관련한 우리의 경험적 판단들의 객관적 타당성의 조건이고, 그러니까 그것들의 경험적 진리의 조건이며, 그러므로 경험의 조건이다. 따라서 현상들의 잇따름에서 인과관계의 원칙은 (연이음의 조건들 아래에 있는) 경험의 모든 대상들에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원칙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니 말이다.
모든 변화의 형식, 곧 그 아래서만 변화가 또 다른 상태의 발생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조건, 그러니까 상태들 자신의 연이음(일어난 것)은 그럼에도 인과의 법칙과 시간 조건들에 따라서 선험적으로 고찰될 수 있다. 만약 한 실체가 상태 a에서 다른 상태 b로 이행한다면, 후자 상태의 시점은 전자 상태의 시점과 구별되며, 그에 뒤따르는 것이다.
#. [제3유추. 상호성의 법칙에 따른 동시성의 원칙] 모든 실체들은 공간상에서 동시에 지각될 수 있는 한에서 일관된 상호작용 속에 있다. 실체들의 관계에서 한 실체가 다른 실체 중에 그 근거가 함유되어 있는 규정들을 함유하는 그런 실체들의 관계는 영향의 관계이며, 만약 교호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에 규정들의 근거를 함유한다면, 그것은 상호성 또는 상호작용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실체들이 공간상에 동시에 있음은 다름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함을 전제하고서만 경험에서 인식될 수 있다.
순전한 현존 이외에도 그것에 의해 A가 B에게, 그리고 거꾸로 B가 A에게 그것의 시간상의 위치를 규정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건 아래서만 당해 실체들이 동시에 실존하는 것으로 경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으니 말이다. 타자에게 그것의 시간상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오직 그것의 원인이나 그것의 규정들뿐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있음이 어떤 가능한 경험에서 인식되려면, 각 실체는 어떤 규정들의 원인성을 타자 안에 갖고, 동시에 타자의 원인성의 결과들을 자기 안에 가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역학적 상호성 안에 있어야만 한다.
#. [4.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들] 사물들의 가능성의 요청은 사물들의 개념이 경험 일반의 형식적 조건들과 합치하는 것을 요구한다. 경험 일반의 객관적 형식은 객관들의 인식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종합을 갖고 있다. 이 종합은 경험에서 빌려온 것이거나, 선험적인 조건으로서의 그것에 경험 일반이 의존하는 그러한 것이다.
지어진 개념들은 그것들이 가능한 성격을 모든 경험들이 그에 의존하는 조건인 범주처럼 그렇게 선험적으로 얻을 수는 없고, 경험을 통해 그 자신이 주어지는 것으로서 후험적으로 얻을 수 있을 뿐이며, 그것들의 가능성은 후험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인식되어야만 하거나, 아니면 전혀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실재성과 관련해 말하자면,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그러한 것을 선험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다.
사물의 순전한 개념에서는 그 사물의 현존의 성격이 전혀 마주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사물의 현존이 지각들의 경험적 연결의 원칙들(유추들)에 따라서 몇몇 지각들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 사물의 현존을 그 사물에 대한 지각에 앞서, 그러므로 비교적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런 경우 사물의 현존은 가능한 경험 안에서 우리의 지각들과 연관되어 있고, 우리는 저 유추들의 실마리를 따라 우리의 현실적인 지각으로부터 가능한 지각들의 계열 안에 있는 사물에 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거나, 또는 현상들의 경험적 연관 법칙들을 따라 전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사물의 현존을 탐색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허장성세일 따름이다.
#. 임마누엘 칸트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철학자. 서양 근대 철학사에서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를 종합해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으며,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서양 철학의 전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칸트가 남긴 저작 가운데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 유명하다. 사망한 지 200년이 흐른 지금도 근현대 철학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독일 관념론의 출발점이자 계몽주의의 완성자라는 별칭도 있다. 칸트의 영향력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근대 철학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 철학에서도 칸트의 영향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칸트의 윤리학은 밀의 윤리학과 더불어 현대 윤리학의 중요한 두 축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