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부정적 연쇄효과와 미치광이 전략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의 시간'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평화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전쟁의 파괴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또다시 전쟁의 시간이 엄습하는 모습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유럽과 러시아의 대립은 격화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간에 전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으며,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이어 그린란드 침공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본인은 저서인 <전쟁의 역사>를 쓰면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는 두 가지 과정을 목도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공포감에 기반한 '부정적 연쇄효과'다. 어느 한 지점에서의 마찰이 사방팔방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현상이다. 이를 작금의 국제정세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러우 전쟁에서 비롯된 '루소포비아'(러시아에 대한 공포감)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이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주요국들은 2030년까지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 3.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특히 독일은 GDP 2.4% 수준의 방위비를 2029년까지 3.5%로 올리는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재무장'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폴란드, 북유럽 국가들까지 국방비를 연쇄적으로 증액함에 따라 유럽 전역에 '군비 증강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또한 양안(중국-대만) 위기에 일본이 가세하는 것도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다카이시 총리는 대만 유사시에 자위대를 개입시킬 수 있다고 했었다. 이에 중국은 "타 죽고 싶나?"라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양안 위기는 동북아 전역에 부정적 연쇄효과를 촉발시키는 화약고가 될 수 있다.
■부정적 연쇄효과-제1차 세계대전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 '제1차 세계대전'이 이러한 현상을 대변한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인 페르디난트가 부인과 함께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자 프린치프에게 살해됐다. 사후 조사에서 프린치프를 비롯해 암살에 관여한 자들이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와 연관돼 있음이 밝혀졌다. 다만 세르비아 정부가 이 사건에 얼마나 연루돼 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격적인 외교전을 펼치며 눈엣가시였던 세르비아에 대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외무장관인 베르히톨트는 독일 베를린으로 가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이 불가피하며, 범슬라브주의 정책의 중심축(세르비아)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 설득된 빌헬름 2세는 해당 주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에 힘입어 베르히톨트는 7월 7일에 열린 제국내각 회의에서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주창했다. 헝가리의 수상인 티서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군사 행동 이전에 요구 조건을 담은 문서를 먼저 제시하자고 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는 여기에 동의했다. 요구 조건은 강경했다. 우선 세르비아 정부에게 제국 영토의 일부 분리를 주장하는 모든 선전을 비난하라고 요구했다. 이 비난을 세르비아 군대에 일일 훈령으로 주입시키라고도 했다. 또한 암살에 연루된 세르비아 공무원들을 체포 심문 처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무원들이 세르비아 영토에서 관련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요구 조건에 대한 답변 시한은 전달 후 48시간으로 못 박았다. 당초 세르비아 정부는 요구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도 가급적 수용하라고 조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라예보 사건의 후폭풍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선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돌연 입장을 바꾸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의 배경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아니꼽게 봤던) 러시아 차르 정부가 세르비아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예방적 차원의 '전쟁준비 태세'를 선언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 공무원이 자국의 영토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 등을 단호히 거부했다. 나아가 군대까지 동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가 젊은 예비군을 소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독일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독일 대사는 "러시아의 군사 조치들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독일도 동원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전쟁'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세계 각지에서 우려가 터져 나왔다. 영국 외교관인 조지 뷰케넌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겨냥해 동원을 선포할 경우 발생할 '부정적 연쇄효과'를 걱정했다. 실제로 부대 배치까지 이뤄지면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다행히 러시아가 완화된 태도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세르비아에 대한 요구 조건을 경감하자는 취지의 협상을 제안했다. 세르비아에 있는 열강의 대사들에겐, 세르비아의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압력을 행사하자고 했다. 독일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직접 협상에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강경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건방진 세르비아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 조치를 내려야 했는데, 문제는 얼마만큼의 강도로 조치를 내릴 것인지였다. 니콜라이 2세는 부분동원과 총동원 사이에서 고민했다. 의외로 강경한 조치가 내려졌다. 일부 장군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부분동원은 물론 총동원도 승인한 것이다. 독일과 인접한 지대에서의 동원까지도 포함하는 후자는, 곧 독일과의 전면전을 각오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독일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며 초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러시아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세르비아 보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억제에 국한됐다. 독일과의 전쟁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조만간 빌헬름 2세가 차르에게 전보를 보냈다. 러시아가 다른 국가들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끔찍한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독일의 중재자 역할을 암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니콜라이 2세와 정부 각료들은 독일의 경고성 전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총동원을 취소하고 부분동원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독일을 안심시킬 수 없었다. 독일 군부는 부분동원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전쟁장관인 폰 팔켄하인은 물론 참모총장인 몰트케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더욱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칫 독일의 동부전선이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결국 몰트케는 러시아의 동원에 맞서서 독일도 강력한 동원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전쟁까지 가는 것을 원치 않았었지만, 마음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독일의 강경한 분위기를 직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총동원령까지 선포하며 확전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움직임에 심대한 위협을 느꼈다. 특히 외무장관인 사조노프와 군부 지휘관들이 그랬다. 기저에는 발칸 지역과 러시아의 흑해 출구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존재했다. 상호 간 느끼는 위기감의 증폭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사조노프는 차르를 만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전달했고,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이었다. 독일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전쟁위험상태'를 선언한 뒤 러시아와 프랑스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는 12시간 이내에 군사 조치를 중단할 것을 확실히 보장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독일의 총동원령이 뒤따를 것이었다. 프랑스는 18시간 이내에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해야 했다. 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움직였다. 이들은 (1892년 러시아와 맺은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독일에 공격받으면 자연스럽게 참전하게 돼 있었다. 프랑스 수뇌부에게는 독일에게 유럽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침략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상존했다. 평소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프랑스군 원수 조프르도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얼마 뒤에 그는 대통령을 만나 총동원령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8월 2일, 프랑스의 총동원령이 선포됐다. 1시간 뒤에 독일도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조지 뷰케넌이 우려했던 부정적 연쇄효과가 현실화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도 움직일 태세였다. 그동안 영국은 물리적 충돌보다는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했다.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프랑스가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양국 간 협정에 기반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도 영국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독일이 벨기에를 겨냥해 최후통첩을 보낸 게 결정적이었다. 이에 따르면 독일은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 영토를 사용해야 하며, 만약 벨기에가 길을 내주지 않을 경우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했다. 앞서 1839년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바 있었다. 이에 근거해 영국 내각은 8월 4일 벨기에를 겨냥한 독일의 군사작전 계획을 중단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독일은 영국의 통첩을 무시했다. 결국 영국도 이날 자정을 기해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전쟁에 돌입하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도 선전포고했다. 3국 동맹의 한 축이었던 이탈리아는 일단 중립을 선언했다.) 사라예보라는 작은 도시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의 후폭풍에 모든 유럽 열강들이 휘말려 들면서, 인류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비극이 고개를 쳐들고야 말았다.
■미치광이 전략-아돌프 히틀러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는 두 번째 과정은 '미치광이 전략'이다. 이는 자신을 광인처럼 보이게 하거나, 실제로 광인과 같은 행동을 통해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국제정치 전략을 말한다. 러시아의 푸틴과 미국의 트럼프가 사실상 이 같은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경우 조지아 침공, 크림반도 병합,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유럽 인근에서 대규모 군사훈련까지 실시하며, 해당 전략을 가감 없이 선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군사, 경제, 무역 등 전방위에서 이 전략을 도입하는 모양새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해도 큰일이 없으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상대로 하여금 적극적인 방어기제를 작동하게 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러시아를 의식한 유럽 국가들의 재무장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 그가 친위 쿠데타인 '장검의 밤'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이후, 독일은 급격히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국제연맹을 탈퇴한 데 이어 군사력을 제한하고 있던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 재무장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독일 육군의 규모가 대대적으로 증강됐다. 군수공장도 활발히 가동됨에 따라 수많은 무기들이 생산됐다. 독일의 움직임에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국가는 프랑스였다. 이들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4개국(영국, 프랑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이 참여하는 집단안보 체제도 구축했다. 나아가 베니토 무솔리니가 통치하는 이탈리아와도 손잡고 스트레사 체제를 수립했다. (무솔리니는 이 체제를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초석으로 삼으려 했다.) 프랑스는 독일을 사방에서 포위해 팽창 야욕을 억제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4개국이 군사적 공조를 이루기 위해선 소련군이 독일과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따라 붉은 군대가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소련과 사이가 나빴던 폴란드가 소련군의 자국 영토 통과를 불허하면서 4개국 집단안보 체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의 자세도 애매했다. 당시 영국 수뇌부는 히틀러를 '대화가 가능하고 외교적 유화책으로 다룰 수 있는 인물'로 여겼다. 이에 따라 독일을 군사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보단 어느 정도 달래면서 타협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1935년 6월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 영국 해군 주력함 총배수량의 35%를 넘기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독일의 주력함 건조를 허용하기까지 했다. 이탈리아와의 관계도 틀어졌다. 영국, 프랑스가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점령 계획에 제동을 걸면서 이탈리아의 외교 노선이 독일 친화적으로 변했다. 히틀러는 우호적인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더욱 과감한 모습을 보였다. 1936년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 제재 논의로 정신없는 사이, 독일군을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에 진주시켰다. 이곳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군대가 들어갈 수 없었지만, 히틀러는 대놓고 무시했다. 독일 국민들은 열광했으며 라인란트 재무장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표를 던졌다. 프랑스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예상보다 과감하게 나오는 독일에 당황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기실 프랑스 수뇌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독일을 물리적으로 막고 싶었으나,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영국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히틀러의 독일은 이러한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프랑스와 손을 잡았던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도 독일의 기세에 짓눌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파시즘을 추구하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책을 포기하고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와 영국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과감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였다.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슈슈니크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난색을 표했고, 국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 했다. 화가 난 히틀러는 국민투표 중단을 요구하는 한편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리아 각지에 있는 나치당원들도 일제히 들고일어나 정부를 압박했다. 겁을 먹은 슈슈니크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후임 총리로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지명됐다. 이는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출 길을 열어줬다. 비록 독일군의 전개가 서투른 감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미크라스 대통령을 강제 사임시키고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에서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양국이 하나가 되면서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대두했다. 다른 국가에 있는 독일계 사람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계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에서 극심했다. 히틀러는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즉각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인들의 소요를 조장 지원했고 이 지역 점령을 위한 무력 불사까지 공언했다. 위기감을 느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프랑스와 소련의 지원도 요청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에 의거해 유사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내부에서도 참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소련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청에 군사적으로 호응할 준비가 돼 있었다. 별안간 유럽에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프랑스 정부는 일단 영국의 의사를 타진해 보기로 했다. 영국은 또다시 애매하게 나왔다. 조약 내용은 공감하면서도 실제 참전에 대해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영국 없이 호전적인 독일을 상대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프랑스는 난처해했다. 서구권에서 대처에 혼선이 빚어지는 사이, 히틀러는 독일군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했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다급해진 영국 수상 체임벌린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에 따라 대단히 굴욕적인 처사를 선보였다. 프랑스의 양해를 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압력을 가한 뒤, 주데텐란트 일부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려 했다. 졸지에 자국 영토를 넘겨주게 될 체코슬로바키아는 격분했지만, 현실적으로 강대국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체임벌린은 해당 지역 할양이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고, 독일이 더 이상의 영토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달랬다.
문제는 히틀러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전쟁을 각오했던 그는 독일군이 주데텐란트 전 지역을 즉시 점령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갈등을 빚는 폴란드 및 헝가리의 영토 문제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뒤, (프랑스의 경우) 동원령을 선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총동원령에도 동의했다. 독일도 맞대응할 것을 천명하면서 유럽에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 미국의 루스벨트는 유럽 국가들이 평화 교섭을 포기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전쟁 열차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려는 찰나, 무솔리니가 중재안을 내놨다. 한 자리에 모여 유럽의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것이었다. 의외로 히틀러가 먼저 동의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함께 하기로 했다. 이에 독일에서 '뮌헨 회담'이 열렸다. 유럽의 4 거두가 모인 이 회담 결과의 핵심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완전히 양도한다는 것과 회담 참여국들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강대국들만의 합의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300만 명에 달하는 인구와 수많은 산업시설 및 요새 등을 갖춘 핵심 지역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독일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도 노릴 수 있게 됐다. 무력하게 양보한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체임벌린은 회담 결과에 만족해했다. 작은 것을 내주는 대신 평화라는 큰 것을 얻었다고 자평했다. 회담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온 그는, 히틀러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를 흔들며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임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를 크게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되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회담 결과를 '불명예'라고 맹비난하며 다가올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다.
과연 처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히틀러는 머지않아 마수를 또 드러냈다.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협박해 체코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편입시켰고,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이미 주데텐란트를 잃을 때부터 저항력을 상실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무력하게 굴복했다. 독일의 이 같은 행위는 뮌헨 협정 파기임에도 히틀러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말로만 떠들고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한 '미치광이 전략' 또는 '벼랑 끝 전술'이 계속 통할 것으로 봤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영국 내부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제 히틀러에 대한 일말의 신뢰도 사라졌으며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체임벌린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히틀러는 한발 더 나아갔다. 이번에는 폴란드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를 노렸다. (독일 군부는 이미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 침공 계획인 '백색 작전'을 수립해 놓았다.) 다급해진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39년 4월과 5월에 서구 국가들과 폴란드 간의 군사방위상호원조협정이 체결됐다. 만약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강경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히틀러는 서구권과 폴란드를 조롱하며, 이들의 뒤통수를 강타할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바로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집단안보 체제에 헌신하려 했다. 그런데 서구권이 자신들을 하위 파트너 정도로 여기며 무시하자 돌아서기 시작했다. 독일은 이 틈을 파고들어 소련에게 접근했다. 양면 전선의 위험을 떨쳐내기 위해선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이 필수였다. 스탈린도 이를 강력히 원했던 만큼 무난하게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됐다. 해당 소식을 접한 영국과 프랑스는 경악했다. 독일과 소련은 근본적으로 양립이 어렵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두 국가는 이념적 측면에서는 양립할 수 없었으나, 실용적 측면에서는 양립이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했던 셈이다. 서구권은 대응 방안을 찾느라 고심했지만 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 1939년 9월 1일, 약 160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이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상호 확실한 파괴
현재의 국제정세가 과거와 같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매우 엄중한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희망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역사를 반면교사하는 자세와 역설적으로 '상호 확실한 파괴' 이론에 거는 기대감이다. 이 이론은 핵보유국 간 전쟁에서 양측이 모두 멸망할 것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전략적 균형을 의미한다. 현대전은 재래식 전력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가공할 만한 핵전력이 동원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이 작용한다. 한쪽에서 핵무기로 선제공격을 한다면, 상대방 역시 강력한 핵반격을 하게 된다. 그러면 양측 모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고 공멸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우려한 양측은 애초부터 전쟁을 회피하게 되고, 핵무기 보유와 운용을 신중히 하게 되는 것이다. '상호 확실한 파괴' 이론은 냉전 시기부터 전쟁 억제의 이론적 기초로 자리매김했으며, 현재도 국제 안보의 핵심 개념이다. 모든 인류는 '전쟁은 곧 공멸'이라는 경각심을 분명히 갖고, 공존과 공영의 길로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