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역사 탐방기] 남한산성

by 최경식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겠는가? 본인은 '삼전도의 치욕'을 꼽을 것이다. 조선의 제16대 군왕인 인조가 (현재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한 사건이다. 변방의 오랑캐로만 알고 있던 세력에게 보란 듯이 치욕을 당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이다. 지금은 유명 관광명소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과거 뼈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슬픈 장소인 셈이다. 현장 탐방에 앞서 해당 사건의 전말을 먼저 살펴보자.


1623년, 쿠데타(인조반정)로 집권한 인조 정권은 전임자인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취했었다.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 기조를 명확히 하며 후금에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후금에서 보낸 사신을 내치고 국서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추후에 청나라(후금의 후신)로 간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당시 후금의 위세가 눈에 띄게 높아지는 상황이었지만, 인조 정권은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같은 기조는 후금을 크게 자극했고,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정묘호란 때 후금은 폐위된 광해군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강력한 후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급히 피난을 떠났다. 이때 조선의 군사들은 나름 열심히 싸웠고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의병들이 선전하며 후금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후금군은 명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조선에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이에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후 철수했다. 그나마 이때까지는 조선이 후금과 동등한 관계였고,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9년이 지난 1636년 상황이 달라졌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단절 및 '군신의 의'를 요구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은 것도 치욕적인데, 군신 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그해 12월 맹장 '용골대'가 이끄는 청나라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용골대의 청나라군은 오로지 인조가 있는 한양만을 목표로 초고속으로 진격했다. 중간에 보이는 다른 성들은 모두 스쳐 지나갔다. 불필요한 전투를 최소화하고 심장부를 정밀 타격해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청나라군의 남하 속도는 과거 정묘호란 때보다도 훨씬 빨랐기 때문에,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발이 묶이게 됐다.


이 당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들은 고작 1만 3000여 명에 불과했다. 식량도 겨우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반면 청나라군은 충분한 준비를 한 상태로 호기롭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더욱이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가 친히 전장에 왔다. 이는 성문을 밖이 아닌 안에서 스스로 열게 만들려는 일종의 심리전 성격이 짙었다. 시간이 갈수록 추위와 배고픔 등으로 성 안의 상황은 심각해졌다. 각 도의 관찰사들이 임금을 구원하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오긴 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홍이포 등으로 중무장한 청나라군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자 성 안에서는 오랑캐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 등 '주전파'(主戰派)의 주장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단 청나라와 화친을 하자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극 중 최명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인조를 설득했다.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 나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선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인조는 오랜 고민 끝에 주화파의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통해 청나라 황제에게 화호를 청했다.


홍타이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서를 보낼 게 아니라 인조가 직접 자신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 선언을 하라고 요구했다. 강도 높은 요구에 당황한 인조와 신료들은 즉각 화답하지 않고 또다시 망설이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가운데 봉림대군 등 일부 왕자들이 피난을 가있던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초 조선은 청나라가 수군이 약해 강화도를 절대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전망이 보기 좋게 빗나가자 큰 충격에 빠졌다. 인조로서는 더 이상 남한산성에서 버틸 여력이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에서 제시한 11개의 굴욕적인 항복 조문을 모두 수용했다. 그런 다음 1637년 1월 30일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성하의 맹'의 예를 행했다. 청나라 황제 앞에 선 인조는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했다. 뒤이어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섰다. 일설에 따르면 땅에 머리를 박은 인조의 이마가 피로 흥건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으로부터 받아낸 항복 조문에 의거해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을 볼모로 잡아가려 했다. 주전파는 물론 주화파까지 세자를 청나라로 보낼 수 없다며 반발했다. 인조도 난감해하고 있을 때, 소현세자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이 너무도 급박하다. 나에게는 종사를 받들 동생이 있고 아들도 있으니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 태조의 14번째 아들인 구왕과 함께 북방 길에 올랐다. 소현세자가 길을 나서기에 앞서 인조에게 절을 하자 모든 신료들이 대성통곡을 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전쟁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 단절하고 청나라에 철저히 복속됐다. 돌아가는 현실을 냉정히 보지 못하고 '탁상공론'에 사로잡힌 대가는 너무도 혹독했다. 이때 맺어진 청나라와 조선의 군신 관계는 약 260년이 지난 1895년 '청일 전쟁' 때까지 지속된다.


지난해 가을에 찾아간 남한산성은 해당 계절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먼저 남한산성의 북문을 만날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다. 이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하지만 특별한 전과는 올리지 못했다.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조선군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군을 공격했으나, 되레 반격을 당해 전멸하고 말았다. '법화골 전투'로 불린 이 전투는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 전투다. 이후 정조 시대에 성문을 개축하고 '전승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병자호란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남한산성은 둘레길이 일품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탁 트인 길을 걷다 보면, 몸과 머리가 상쾌해지고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도 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다 본 서울은 아름다웠다.


문제의 남한산성 서문이다. 이 문은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에 항복하러 갈 때 통과한 문이다. 4개 대문 중 가장 작고 오래됐다. 경사도 급해 이 문으로는 물자 수송도 힘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홍타이지가 굳이 인조에게 이 문을 통해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굴욕감을 안기고 싶었던 의도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다.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이다. 남한산성 방어의 최고 책임자는 수어사였다.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전쟁 중에 훈련도감을 설립했다. 이것과 더불어 4개의 지방 상비군을 설치했는데, 그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이다.


다시 밑으로 내려오면 남한산성 행궁을 접할 수 있다. 경기도민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 3년(1625년)에 만들어졌다.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 개 이상의 행궁이 있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리더의 조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리더란 정세를 제대로 읽는 통찰력과 유능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갖춰지면 국가와 백성을 살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국가와 백성을 죽인다. 전임자인 광해군은 폐모살제 등 과오도 있었지만, 남다른 통찰력과 유능함으로 국가와 백성을 별 탈 없이 온존 시켰다. 하지만 인조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해 커다란 화를 자초했다. 조선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통틀어 인조만큼 안 좋은 군왕도 별로 없을 것이다. 작금의 정세를 돌아보면 제2의 남한산성을 연상시킨다. 그 시대 조선이 청나라와 명나라의 패권다툼 틈바구니에 끼어있었다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형국이다. 리더의 통찰력과 유능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두 번 다시 남한산성과 같은 치욕의 역사가 반복될 수는 없다. 이 시대의 리더들이 과거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제대로 된 정치를 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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