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통한의 장면들
최근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영화는 조선의 제6대 군왕인 '단종'에 관한 이야기다. 잘 알려졌다시피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영화는 단종의 유배 생활을 해당 지역 호장이었던 엄흥도의 관점에서 묘사했다. 그동안 수양대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은 대중매체에서 많이 그렸지만, 유배 생활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매체물은 거의 없었다. 예상대로 영화 내용이 너무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는 후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본인은 그간 책이나 일반글을 통해 단종 관련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이번에는 특별한 영화의 개봉을 맞아 다른 각도에서 단종 이야기를 해보겠다. 기실 '단종 애사'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역사였다. 적장자의 적장자라는 화려한 정통성을 갖고 태어난 단종의 앞날에는 장밋빛 미래만이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몇 가지 치명적인 운명들이 그를 비극의 길로 내몰았다.
■문종의 죽음
먼저 아버지인 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문종은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라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군왕이었던 태종 이방원은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세자로 세울 때, "충녕 아들에겐 장대한 놈(문종)이 있다"라는 말도 남겼다. 충녕을 새로운 세자로 내세우는 명분에도 꼽힐 만큼 문종은 영특했던 것이다. 문종은 세자 시절에 날마다 서연을 열어서 강론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든 동작을 한결같이 법도에 따라 했다. 감정 변화를 얼굴에 잘 나타내지도 않았으며, 여색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항상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며 수양했던 것이다.
문종은 자라면서 과학, 천문, 병법, 무예, 음악, 음운 등 다방면에 통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찬사를 받는 기발한 발명품들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세종 때 발명된 측우기와 화차(이동식 대포)는 문종이 제시한 생각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또한 세종의 치세 마지막 7년 정도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종 말기에는 문종이 대신 정사를 잘 돌보며 국가와 백성을 안정시켰다.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전세법 제정과 훈민정음 반포 등도 문종의 손길이 미친 치적들이었다. 문종은 능력뿐만 아니라 용모도 매우 출중했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문종을 보고는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제갈공명'에 비유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하고 성군적 자질이 다분했던 왕. 만약 문종이 세종의 뒤를 이어 장기간 국가를 통치했다면, 태평성대는 계속되고 국가는 크게 발전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문종 생전에 수양은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없었다. 친형이 '넘사벽' 수준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종은 오래 살지 못했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인 1452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던 아버지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아버지를 능가할 수도 있었던 전도유망한 왕이 죽자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궐에 진동해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며 거리의 소민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사왕(단종)이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의 상사보다도 더하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존재가 사라지자, 수양이 그동안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현덕왕후의 부재
단종은 아버지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전에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를 잃었다. 그녀는 1441년에 단종을 낳은 직후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보통 어린 왕이 보위에 오르면, 그의 어머니인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초반에는 막후에서 국정을 대신 운영하다가, 왕이 장성하면 자연스럽게 권력을 넘겨주는 형식이었다. 현덕왕후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단종의 뒤에서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랬다면 수양과 그 무리들은 결코 준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덕왕후와 관련된 흥미로운 야사를 빼놓을 수 없다. 단종이 죽은 후 수양의 꿈에 현덕왕후의 혼령이 나타나 침을 뱉으며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이 직후에 수양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죽었다. 분노한 수양은 경기도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의 소릉을 파헤친 뒤 그 관을 강에 버렸다. 관 속에 있던 시신은 토막 내 소각한 다음 강에 뿌렸다. 또한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서 내쳤다고도 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존재해 신빙성은 떨어진다.
■고명대신들의 방심
수양이 일으킨 계유쿠데타가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높았던 반란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반란은 성공 가능성보다 실패 가능성이 확연히 높았다. 수양은 주변에 적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 문종의 고명(유언)을 받은 대신들이 있었다. 기실 이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수양을 제거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대신들의 권력이 수양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수양이었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대신들의 자만과 방심이다. 수양이 잠재적으로 큰 위협임을 인지했음에도 서둘러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세력을 키울 시간만 벌어줬다. 대신들과 달리 수양은 치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중요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나아가 정적들을 처단했다. 마치 12.12 쿠데타 때 전두환 신군부가 그랬던 것처럼, 수양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승자가 됐다.
■복위운동 실패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복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으로 불리는 충신들이 나서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처단하려 했다. 상황을 엿보던 이들은 드디어 거사를 단행할 기회를 포착했다.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을 환송하기 위해 창덕궁에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세조도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왕의 양옆에서 칼을 들고 서있는 별운검으로 (사육신과 함께 하는) 성승과 유응부가 선택됐다. 밀착해 있는 만큼, 마음만 먹으면 세조를 죽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성삼문 등은 거사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거사 당일 문제가 발생했다. 연회 장소가 비좁고 더워서 굳이 별운검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생육신 중 한 명이었던 남효온이 '추강집'에 수록한 '육신전'에서는 한명회가 이 같은 의견을 제기한 것으로 나온다. 세조가 직접 의견을 제시해 별운검을 취소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다급해진 성삼문이 나서서 세조에게 "별운검을 취소할 수 없다"라고 외쳤다. 허사였다. 결정적으로 신숙주가 별운검 취소가 합당하다는 주장을 펼쳐서, 최종적으로 별운검은 연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됐다. 이때 단종의 이모부인 윤영손이 화를 못 참고 신숙주를 죽이려 했지만 성삼문이 말렸다. 당초 계획이 흐트러짐에 따라 성삼문은 일단 동지들에게 거사를 미루자고 제안했다. 대부분이 동의했지만, 무신인 유응부만큼은 반대했다. 그는 추후에 어찌 될지 모르니 이번에 세조 암살을 강행하자고 했다. 성삼문 등은 유응부를 적극 말려 단념시켰다. 이후 거사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기약 없이 시간만 흘러가면서 사육신 비극의 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당초 충실한 동지이자 집현전 출신이었던 김질이 화근이었다. 그는 연회장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 이러다가 거사 계획이 발각돼 본인은 물론 가문 전체가 멸족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김질은 동지들을 배신하기로 했다. 그는 장인이자 주요 대신인 정창손을 찾아가 단종 복위 운동 계획을 알렸다. 이를 들은 정창손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즉각 김질과 함께 세조를 찾아갔다. 밀고를 접수한 세조는 대로했다. 그는 거사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명했다. 김질의 입에서 언급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이 우선적으로 체포돼 국문을 당했다. 성삼문이 국문을 받다가 관련자로 박팽년, 유성원 등을 언급했고, 이후 박팽년이 국문을 받다가 관련자로 김문기, 성승, 윤영손, 송석동 등을 언급하면서 국문의 규모는 매우 커졌다. 이 밖에 박중림, 권자신, 최득지, 박기년 등이 추가되면서 단종 복위 운동 혐의로 국문을 받은 사람은 무려 7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세조의 처형 방식은 매우 잔인했다. 그는 충신들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도 시행했다. 주변 신료들을 처형장으로 오게 해 직접 관람하게 만들기도 했다.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추가 거사를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이다. 절박한 충심으로 시작됐던 단종 복위 운동은, 충신들의 비극은 물론 역설적으로 단종의 비극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그곳에서 한 많은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비겁한 양녕과 효령
선왕도 없고 대왕대비도 없다면, 마땅히 왕실의 큰 어른인 양녕과 효령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줬어야 했다. 양녕과 효령은 태종 이방원의 첫째, 둘째 아들이다. 수양과 그 무리들이 준동하려 할 때, 이들이 전면에 나서서 단종 편을 들고 수양을 꾸짖었다면 수양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노골적으로 수양 편을 들었다. 수양의 거사가 명백한 반란임을 인지했음에도 그랬다. 양녕은 한발 더 나아가 수양에게 단종을 폐위하고 죽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양녕이 자신의 왕위를 세종에게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으로 말미암아, 세종의 가문을 참극으로 몰아넣으려 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양녕만큼은 아니지만, 효령 역시 적극적으로 수양 편을 들었다고 한다. 명색이 왕실의 큰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비겁하게 행동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에필로그
본인은 여러 글을 통해 단종과 수양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수양은 당대에는 힘으로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역사에서는 철저히 패배했다. 당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양의 밑에 들어갔지만, 역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양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반면 단종은 당대에는 패배했을지 모르지만, 역사에서는 승리했다. 복위 운동을 주도했던 충신들도 당대에는 패배했지만, 역사에서는 승자로 남았다. 사람들은 단종과 충신들을 애정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억하고 있다. 수양과 그 무리들은 증오와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강원도 영월 등 전국 각지에서는 해마다 단종 관련한 문화제가 열리지만, 수양을 기리는 문화제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정의'(正義)이다. 역사는 얼핏 보기에 엇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이 같은 진리를 과거에도 보았고, 앞으로도 보게 될 것이다.
불멸의 고전인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불의가 승리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과연 '하늘의 도'라는 게 있는가?" 하늘의 도는 분명히 있다. 단지 유예될 뿐이다. 이 시대의 위정자들이 하늘의 도를 믿고, 당대에 잠깐 살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