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7] 모든 신하들이 표적이 된 핏빛 학살
#.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의 서두 부분.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일기 中
연산군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폭군'(暴君)의 대명사로 불린다. 왕권을 자의적이고 폭력적으로 휘두르며 무수한 신하들을 죽였고, 끊임없이 향락을 추구하며 백성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특히 연산군의 자의적, 폭력적 왕권 행사의 정점은 '사화'(士禍)이다. 표면적인 정의는 훈구파에 대응해 성종대에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기실 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듣기 불편한 소리를 하는 사림을 겨냥해, 연산군과 기득권인 훈구파가 손을 잡고 공격을 가하는 형국이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결부된 제한적이고 '있을 수 있는' 숙청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추후에 사림은 물론 훈구파마저도 연산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큰 화를 입게 되는 형국이 조성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우리나라의 숙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성적인 명분이 확보된 상태에서 숙청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주도한 갑자사화는 이성적인 명분은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왕 개인의 비정상적인 감정(폐비윤 씨 사건, 향락 추구)에 기반했고,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끔찍한 방식이 동원돼 대규모 학살을 야기했다. 연산군과 극히 소수의 측근들 외에는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러한 측면에서 갑자사화는 대단히 처참하고 기이한 사건이었으며, 연산군을 희대의 폭군으로 만드는 결정타였다. 이후에도 전제왕권에 대한 미몽과 개인적인 향락 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폭군에 의해 성종대에 표출됐던 유교적 왕도정치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나아가 조선이란 나라의 국운 자체가 심각한 도전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반정'(反正)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다행스러운 사건이었다. 연산군으로 대변되는 극히 잘못된 상태를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수단은 ‘무력에 의한 폐위’밖에 없었다. 다만 군왕이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에 의해 왕이 쫓겨나가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왕이 즉위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장면이기도 했다. 희대의 폭군의 무차별적인 학살극, '사화'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