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6] 조선의 헌정질서 파괴 사건 전말
#.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의 서두 부분.
擊鼓催人命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 재촉해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기울어
黃天無一店 황천 길엔 주막 한 곳 없다니
今夜宿誰家 이 밤을 뉘 집에서 묵어갈고 -성삼문 '절명시' 中
신생국가 조선은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반석 위에 올랐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학문 등 다방면에서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다. 건국 초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등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로소 장거리를 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태평성대'(太平聖代)는 세종 이후에도 능력과 정통성이 있는 후계자들에 의해 변함없이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감히 왕위를 넘봐서는 안 됐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이 전면에 등장,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국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의해 김종서, 황보인 등 선왕의 충신들이 대거 척살됐고,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죽임을 당했다. 이후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까지 했다.
비록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세조는 '정통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군왕이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저항이 일어났고, 세조는 이를 잔혹한 방법으로 탄압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육신' 사건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유학자들은 세조를 충의를 저버린 역적으로 규정, 급기야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거사는 실패했고, 세조는 사육신을 포함한 수십 명의 '충신'들을 사지를 찢는 방법까지 동원해 죽였다. 정통성이 없는 왕은 이런 잔혹한 방법을 통해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조는 당대에는 힘으로써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조카와 충신들을 죽여가며 적장손 왕위 계승 등 조선의 유교적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특권을 갖는 '공신' 세력을 양산해 후대에 왕권 약화 및 당파 싸움을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군왕으로써의 직무 수행에 있어선 분명 잘 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서술한 심각한 행위들이 그 모든 것들을 묻어버렸다. 반면 사육신 등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충신들은 당대에는 패배했지만, 역사 속에서는 승리했다. 세조가 키운 공신들이 판을 쳤던 조선 초기를 벗어나 조선 중후기부터 사육신 등과 결을 같이 하는 '사림'(士林)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이후 현재에 이르러선 '충절의 화신'으로 규정됐다. 결국 후대의 사람들은 업적이 아닌 올바른 도리인 '정의'에 입각해 세조와 사육신, 단종, 그리고 그 시대상을 평가한 것이다. 정통성 없는 왕의 잔혹한 무리수, 세조의 '충신 숙청'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