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4] 사상 유례없는 전 왕족 몰살사건 전말
#.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의 서두 부분.
"신민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이다. (공양)군을 관동에 가서 있게 하고 그 나머지 동성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을 보완하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 동래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과 친속의 명운을 장님 이흥무에게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죄(服罪)하였다. 군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과 법관이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다.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고 대소 신료들이 또 글을 올려 간청하므로, 내가 마지못해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은 이 사실을 잘 알라." -태조 이성계 '교서' 中
47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 왕조는 1392년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기치로 내건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들에 의해 무너졌다. 역성혁명은 중국 유교 정치사상의 기본 관념 중 하나로, 제왕이 부덕해 민심을 잃으면 덕이 있는 다른 사람이 천명을 받아 왕조를 바꿔도 좋다는 사상이다. 당시 고려 왕조는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이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후 좀처럼 개혁의 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표류했다. 원·명 교체기라는 역동적인 국제정세는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화도 회군'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터지면서 고려 왕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망국'(亡國)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얼핏 보면 역성혁명론과 이성계의 즉위는 충분한 명분과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공양왕)을 제치고 이성계가 새로운 군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이 온당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선위(禪位) 절차가 없었고, 사실상 신하가 왕을 '축출'하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이에 따라 이성계의 즉위 및 조선 건국은 정통성이 부족했다. 조선의 신료들은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불거질 수 있는 위험성을 심히 우려했다. 그 위험성이란 전 왕족인 '개성 왕씨'들이 구심점이 된 고려 부흥 운동을 말한다. 날이 갈수록 신료들의 예민함과 우려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는 결국 '왕씨 숙청'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기실 조선왕조실록에선 왕씨 숙청 규모를 축소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규모로 숙청이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왕씨 숙청은 조선 왕조에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줬다. 역사적으로 빈번히 있었던 전 왕조 부흥 운동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렸고, 나름 안정적인 바탕 위에서 왕조가 지속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심지어 조선 초 '제1,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과 같은 큰 혼란 속에서도 전 왕조 부흥과 관련한 움직임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왕씨 숙청은 그 자체로 지탄받을 여지가 다분하다. 국내 역사만 보더라도 새로 출범한 왕조가 전 왕조 사람들을 대거 살육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려의 경우 전 왕조인 신라를 온전히 품었다. 정통성이 부족한 조선의 신료들은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그야말로 '선을 세게 넘는' 행위를 했던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불어닥친 첫 번째 피바람, 조선 왕조의 '왕씨 숙청'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