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1000명이 떼죽음 당하다..선조의 '기축옥사'

[숙청의 역사 8] 암군의 시대, 역사상 최대·최악의 옥사

by 최경식
기축록.

#.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한국사편'의 서두 부분.


"선조 이후 하나가 갈려 두 당이 되고, 둘이 갈려 네 당이 되고, 넷이 또 갈려 여덟 당이 되었다.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서 그들의 자손은 그대로 원수가 되어 더러는 죽이기까지 했다.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고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다. 길사나 흉사가 있으면 수군수군 서로 헐뜯으며 결혼이라도 하면 무리를 지어 공격했다. 심지어 언동과 복색까지 모양을 달리해 길에서 만나도 가려낼 수 있었다." -이익 '성호사설' 中


역사에는 부정적인 유형의 군주로 폭군(暴君)과 더불어 ‘암군’(暗君)이 존재한다. 크게 보면 둘이 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 폭군은 앞서 다뤘던 연산군처럼 시종일관 다른 사람들을 힘이나 권력으로 억누르며 사납고 악한 짓을 일삼는 군왕을 말한다. 반면 암군은 사납고 악한 특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지만, 폭군처럼 항상 그러한 특성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다만 특정한 시기에 해당 특성을 과하게 표출하며, 심각한 어리석음까지 갖추고 있다. 조선 역사상 대표적인 암군에는 언제나 (인조와 함께)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가 꼽힌다. 그는 기본적인 성품이 모질고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선조가 왕위에 있을 때,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격변기에 놓여있었다. 바다 건너 일본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고, 조정에서는 정치 구도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라는 암군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굵직한 '재앙'을 연이어 발생시켰다. 우선 1592년에 발생한 일본과의 7년 전쟁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기축년인 1589년에 조선의 선비 10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기축옥사'(己丑獄事)도 있었다. 이는 조선사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광범위하게 진행된 옥사로 여겨진다.


기축옥사의 기원은 선조 때부터 조정의 중심세력이 되는 '사림'(士林)이 내부적으로 자리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朋黨)을 형성하면 서다. 초반에 두 세력은 학문과 이념을 바탕으로 비교적 무난한 대립 관계를 나타냈다. 하지만 실체가 불분명한 모반사건(정여립 모반 사건)이 발생하면서 두 세력의 관계는 파탄이 났고, 조선 사회에는 이른바 '숙청'의 광풍이 휘몰아친다. 비단 역모 사건 처리에서 벗어나, 이를 빌미로 반대 세력 전체를 살육에 기반해 전방위적으로 탄압을 하는 암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 선조의 어리석고 괴팍한 성격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극심한 당쟁과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암군이 만났을 때, 어떠한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기축옥사는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죽임을 당해 임진왜란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옥사의 피해가 가장 컸던 전라도는 정계에서 일부 배제되는 등 지역 문제로까지 비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한 이때부터 붕당의 본질이 변질돼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죽이는' 형국이 표면화 됐다. 그럼에도 이를 주도한 세력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이후의 역사에서 옥사의 폐해는 축소되고 은폐됐다. 대표적인 암군의 시대에 역사상 최대, 최악의 옥사로 평가를 받는 '기축옥사' 전말을 되돌아봤다.

keyword
최경식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기자 프로필
팔로워 3,181
이전 07화희대의 폭군의 무차별 학살극...연산군의 '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