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5가지 결정적 장면들
1.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강제 연행
'10.26 사건'으로 18년 간 장기집권을 했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이를 계기로 정치범 석방 등 사회를 옥죄던 유신체제의 억압이 완화되면서 국가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군부 내에서도 변화 움직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총장(대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군부 내 사조직을 만들고 정치 행위를 일삼던 군인들을 좌천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정 총장이 겨냥한 군인들은 다름 아닌 전두환 보안사령관(소장) 등 육군사관학교 11기가 중심이 된 '하나회'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구(舊) 군부'를 의식해 박정희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키운 '신(新) 군부'였다.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전두환 등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든든한 뒷배경은 사라지게 됐다. 정 총장은 사건 직후 우선 군부 내 요직에 충실한 군인들로 정평이 난 인물들을 앉히며 지휘 계통을 개편해 나갔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군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정 총장은 문제가 되는 신군부의 핵심적인 인물들을 신속히 지방으로 좌천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노 장관은 즉답을 피하고 좀 더 시간을 두며 고민해 보자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정 총장이 계획했던 즉각적인 인사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정 총장의 강력한 의지로 조만간 조치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인사와 관련한 보안이 새면서, 전두환에게도 정 총장의 계획이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두환은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이었다. 나라를 뒤흔든 사건에 대한 수사책임자였던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계획이 현실화되면 하루아침에 힘없는 한직으로 밀려날 터였다. 위기감이 높아진 전두환은 모종의 반격을 모색했다. 그는 최측근인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등은 10.26 사건에 있어 정 총장의 '혐의점'을 도출해 냈다. 그런 다음 그를 '강제 연행'해 직접 수사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해당 혐의점이란 10.26 사건 당시 정 총장이 사건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의 내란 행위를 '방조'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 총장이 김재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혐의도 추가했다.
11월 중순, 전두환은 노태우 9 사단장, 유학성 국방부군수차관보, 황영시 1 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을 만나 정 총장 연행 및 추후 행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했다. 아울러 박희도 1 공수여단장, 박준병 20 사단장, 최세창 3 공수여단장, 장기오 5 공수여단장 등과도 사전 접촉했다. 최종적으로 12월 12일이 거사일로 확정됐다. 다음날인 13일에 개각이 있는 만큼 그전에 거사를 단행하기로 한 것이다. (전두환은 훗날 법정에서 같은 숫자나 짝수를 좋아해 12월 12일로 정했다고 진술했다.) 비로소 '쿠데타' 실행계획이 정식으로 수립됐다. 실제 거사가 벌어지면 전두환과 만난 인물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의 명령이 아닌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었다.
운명의 날인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측은 우선 정 총장의 최측근들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을 연희동 요정 연회로 유인해 묶어놓았다. 뒤이어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병력 50명이 정 총장이 머물고 있는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동했다. 이들은 공관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을 무차별 총격을 가해 제압했고, 공관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했다. 허삼수, 우경윤 등은 공관 안으로 들어가 정 총장을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허삼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정 총장 연행 의사를 표명했다.
그가 당시 현장에서 밝혔던 정 총장 연행 이유는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았으니 이와 관련해 총장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언은 공관이 아닌 자신들이 준비한 별도의 장소(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해야 한다고 첨언했다. 정 총장이 최규하 대통령(당시 권한 대행)이 지시한 것이냐고 묻자 허삼수는 "재가가 있었다"라고 답했다. (물론 정 총장 연행과 관련한 대통령의 사전 재가는 없었다.) 정 총장은 이를 믿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대통령에게 확인을 하겠다고 했다. 정 총장이 부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화 연결을 하려던 그 순간, 허삼수, 우경윤이 달려들어 정 총장을 강제로 체포했다.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러 갔던 부관은 허삼수 등이 대동했던 또 다른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총격을 받아 쓰러졌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 총장은 곧장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2. 대통령 재가 거부와 장태완의 포효
같은 시각, 전두환은 직접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정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구했다. 자신의 '직속상관'에게 물리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중차대한 일인 만큼, 대통령의 사전 재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전두환이 최 대통령에게 밝힌 정 총장 연행 이유는 10.26 사건 방조 및 새로운 혐의점(돈을 받은 것 등) 발견이었다. (이때 최규하가 머물고 있던 총리 공관도 전두환 측의 반란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하지만 최 대통령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국방부 장관을 만나 논의를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정 총장 강제연행 시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발생한 총격전 소리에 놀라 급히 몸을 피한 상태였다. 대통령의 계속된 거부로 인해 전두환은 사전 재가를 받는 것을 포기했고, 쿠데타를 지휘하는 장소인 경복궁 30 경비단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장세동 등 쿠데타를 함께 실행하는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전두환 측이 추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던 중 갑자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 총장이 중용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 술자리에 있다가 정 총장 납치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자신의 부대로 돌아온 그는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후 전두환 등에게 정 총장을 즉각 '원상 복귀'시키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유학성 등이 장태완에게 경복궁으로 와서 함께 하자며 거듭 회유하자 장태완은 "너희들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고 외쳤다. 신군부의 갖은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은 장태완의 이 같은 모습은 아직까지도 '참 군인'의 표본으로 회자되고 있다.
3. 보안사의 감청공작
장태완의 강경한 태도에 전두환 측의 대응도 빨라졌다. 느긋하게 있다가는 장태완의 전차 부대가 밀고 들어와 포문을 열 것이라는 위기감이 증폭돼 있었다. 전두환은 박희도 1 공수여단장에게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무력으로 장악할 것을 명령했다. (동원할 수 있는 부대들 중 1 공수여단의 기동력과 접근성이 가장 좋았다.) 이와 함께 노태우 9 사단장은 전방부대 병력을 빼내 서울 중앙청으로 출동시켰다. 전방부대 병력 이동은 한미연합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지만, 완전히 무시됐다. 전두환 측은 육군본부 국방부 중앙청 등 핵심 기관들을 신속히 장악하는 것만이, 승리이자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1 공수여단이 빠르게 진격해 오자 장태완은 박희모 30 사단장에게 연락해 1 공수여단의 진입로인 행주대교를 봉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지점에서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위력이 발휘됐다. 보안사는 군의 정보기관이었다. 보안사는 군대 내 통신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장태완 등의 통화를 실시간으로 감청, 동향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또한 각급 부대의 보안사 요원들을 통해 육군본부 등이 동원하려는 부대의 지휘관들을 설득, 부대 동원을 사전에 봉쇄해 버렸다. 장태완이 박희모에게 말한 내용을 접수한 보안사 요원들은 즉각 박희모에게 연락했다. 그들은 최 대통령과 전두환이 함께 있고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는 등의 거짓 정보를 흘리며 1 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박희모는 보안사의 집요한 감청공작에 넘어갔고, 1 공수여단은 무난히 행주대교를 통과해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4. 9 공수여단, 운명의 회군
전두환은 12.12 쿠데타를 시행하기에 앞서, 유사시 어느 부대보다 신속하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4개 공수여단 중 1,3,5 공수여단을 쿠데타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남은 9 공수여단은 포섭하지 못했던 만큼, 전두환은 쿠데타 당일 밤 이 부대의 출동을 우려하고 있었다. 9 공수여단의 화력과 규모는 매우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이런 가운데 감청공작으로 행주대교를 무사 통과했던 박희도의 1 공수여단이 육군본부의 강력한 명령으로 원대복귀를 하게 됐다. 전두환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상황은 일순간 틀어졌다. 나아가 우려했던 9 공수여단의 서울 출동마저 이뤄지면서 전두환 측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다급해진 박희도는 경복궁 30 경비단에서 신속히 자신의 부대(1 공수여단)로 돌아갔다. 그는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의 명령도 무시한 채 원대복귀한 1 공수여단을 다시 서울로 출동시켰다. 육군본부 측의 9 공수여단과 전두환 측의 1 공수여단이 서울에서의 무력 충돌을 앞두고 있는 '폭풍 전야'와 같은 상황이 도래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전두환 측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묘안'을 육군본부에 제안한다. 그것은 서울에서 '내전'이 발생할 수 있으니, 각자가 동원한 부대를 동시에 원대복귀시키자는 것이었다. 일종의 '신사협정'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육군본부는 즉각 수용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 제안이었다. 이때 육군본부의 어처구니없는 결정의 배경에는 두 가지의 믿음이 존재했다. 첫째 전두환 측도 내전을 진심으로 우려하는 만큼 반드시 회군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둘째 만약의 경우 9 공수여단 외에도 즉각 동원할 수 있는 또 다른 부대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전두환 측은 내전을 불사하는 한이 있어도 회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9 공수여단 외의 부대는 이미 보안사의 감청공작 등으로 동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9 공수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회군을 했다. 육군본부는 전두환 측의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를 스스로 거둬들였던 것이다. 반면 전두환 측의 1 공수여단은 다시 행주대교를 지나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와 국방부로 빠르게 진입해 들어갔다. 뒤이어 전방에 있던 노태우의 9사단 병력도 중앙청으로 진입했다. 전두환 측의 부대에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을 장악한 전두환 측은 끝까지 저항 의지를 불태웠던 장태완, 정병주 등을 체포해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앞서 장태완은 전세가 기운 것을 알았음에도 수경사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 지휘 장소인 경복궁으로 진격해 포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내전을 우려한 부하들의 만류와 노태우 9사단 병력의 포위 작전 등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병주는 일찌감치 신군부에 포섭된 부하들의 배신으로 한쪽 팔에 총상을 입은 채 억류돼 있었다. 전두환 측은 행방불명됐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도 찾아내 정 총장 연행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고, 대통령에게도 사후 재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룻밤 만에 12.12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5. 쿠데타 이후
쿠데타 직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권력을 장악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일개 별 두 개짜리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사실상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후 전두환 측은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5·17 쿠데타'를 감행했고,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권력의 정점에 실질적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쿠데타를 막고자 했던 군인들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정 총장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육군참모총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됐고, 강제로 전역까지 당했다. 정 총장과 뜻을 같이 했던 장태완과 정병주 등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장태완의 경우 그 아들과 부인이 자살을 하는 등 가족들의 삶에도 불운이 닥쳤고, 정병주는 본인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12.12 쿠데타는 그것을 주도했던 전두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80년부터 1993년까지는 정당화됐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됐다. 아울러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12.12 쿠데타에 대한 재수사가 이뤄졌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