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12.12 쿠데타' 이래, 대한민국 군대는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등등이 온통 하나회 일색이었다. 초기에는 전두환계 하나회 군인들이 득세했다면, 후기에는 노태우계 하나회 군인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나아가 하나회는 대한민국을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군부뿐만이 아닌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등 전 분야에 하나회의 영향력이 미쳤다. 다만 하나회 내부에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에 알력 다툼은 있었다.
2. 김영삼의 등장
1993년 2월, 김영삼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이 군부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국내 언론과 국민들은 물론 해외에서도 김영삼이 군부와 타협 내지는 '어색한 동거'를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김영삼의 계획은 전혀 달랐다. 그는 취임 이전부터 하나회를 철저하게 숙청할 것이라 마음먹었다. 숙청 계획은 이른바 '비선 라인'이 주도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체를 치는 것인 만큼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 권영해 국방부 장관도 사전에 숙청 계획을 인지하지 못했다.
3. 예고편
김영삼이 취임 직후 육군사관학교 49기 졸업·임관식에서 행한 연설은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4. 육참총장·기무사령관 숙청
3월 8일, 권영해 국방부 장관은 김영삼의 호출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와 조찬을 함께 했다. 조찬을 하면서 김영삼은 대뜸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하느냐"라고 물었다. 권영해는 "군인들은 별도로 사표를 내는 일 없이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하면 복종한다"라고 답했다. 김영삼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불쑥 한 마디를 꺼냈다.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을 바꿔야겠다."말 그대로 '폭탄선언'이었다. 하나회의 핵심이던 김진영을 교체하겠다는 말에 권영해는 당황했다. 그는 "지금 육참총장을 교체하면 대규모 후속 연쇄인사가 불가피하다. 정기인사 때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김영삼은 "아니다.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을 지금 즉시 바꾸겠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의 임기는 한참 남아있던 상황이었지만, 이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김영삼의 머릿속에는 이들을 대체할 후임자도 정해져 있었다. 권영해는 군 통수권자의 뜻을 받들어 김진영, 서완수를 전격 해임했고 후임자를 바로 취임시켰다. 이들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매우 신속한 조치가 이뤄졌다. 김진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의를 하다가 해임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5 공화국 탄생의 일등공신들이자 이전 정권 내내 군부의 대못으로 남아있던 두 인물을 김영삼은 '단번에' 뽑아버렸다.
5. "놀랬제?"
김영삼은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 나가 "놀랬제?"라고 물었다. 기실 비서관들은 물론 전 국민들이 놀랐다.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회를 포함한 군부 전체가 경악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김진영, 서완수 해임이 대대적인 '하나회 숙청'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단순히 노태우가 그랬던 것처럼, 김영삼도 전두환 측근 장군들 몇 명만을 쳐낸 후 공석이 된 요직에 본인의 측근들을 세우려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대단한 착각이었다. 하나회를 표적으로 한 김영삼의 숙청은 이제 군 전체에 전방위적으로 뻗어 나간다.
6.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 숙청
김진영, 서완수 해임의 충격파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한 달이 채 안돼 또 다른 충격파가 터졌다. 이번에는 수도 서울 인근에 주둔한 '충정부대' 특수전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의 수장들이 표적이 됐다. 4월 2일, 권영해는 통수권자의 권한을 내세워 김형선 특전사령관과 안병호 수방사령관을 보직 해임했다. 두 사람의 해임은 권영해조차도 하루 전에 알았을 정도로 극비로 진행됐다. 이번에도 김영삼의 비선 라인이 주도했던 것이다. 다른 장성들은 해임 당일 권영해가 국방부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 알게 됐다.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 숙청으로 하나회 맏형격들이 모두 제거됐다.
7. 하나회 명단 살포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이 숙청되는 날, 또 다른 장소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당시 교육사령부 지원처장을 맡고 있던 백승도 대령이 하나회의 명단이 적힌 문서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 아파트에 뿌렸던 것이다. 문서에는 육사 20기 중장급부터 36기 중령급까지 하나회 125명의 명단이 있었다. 그런데 당초 국방부 장관인 권영해와 육군참모총장 김동진은 문서가 명확하지 않다고 판단해 김영삼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비하나회 군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해당 문서를 열심히 복사해 전국에 널리 뿌렸고, 자연스레 사건은 확대됐다. 4월 13일, 법무감실에서 마지못해 조사에 착수하려는 가운데 언론에 처음으로 해당 명단이 보도됐다. 이제 모든 비하나회 군인들과 국민들이 하나회의 실체를 제대로 알게 됐다. 여론은 폭발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느꼈던 비하나회 군인들이 대거 들고일어나 '하나회 척결'을 외쳤다.
8. 야전사령관들 숙청
4월 8일, 김영삼과 비선 라인은 야전에 있는 지휘관들을 손보기 시작했다. 구창회 3군 사령관과 김연각 2군 사령관이 즉시 전역 조치됐다. 조남풍 1군 사령관도 잠시 유임됐다가 경질됐다. 이들을 대체해 새로 임명된 김진선 2군 사령관과 윤용남 3군 사령관 등은 하나회를 배척했거나 하나회에게 고초를 겪은 전력이 있었다. 7일 뒤인 4월 15일에는 대대적인 군단장, 사단장급 인사까지 단행됐다. 이때 4명의 군단장, 8명의 사단장이 교체됐다. 대부분이 하나회 군인들이었다. 신임 군단장 중 표순배 중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비하나회였고, 신임 사단장도 거의 비하나회였다. 이와 같은 시점에 전영진 국방부 인사국장과 최승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도 교체됐다. 5월에 접어들면 야당을 중심으로 한 12.12 쿠데타 관련 대정부 질의응답이 있었다. 이때 김영삼 정권은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일련의 과정으로 인해 또다시 군부 내 하나회 군인들에 대한 숙청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선 2군 사령관, 안병호 2군 부사령관, 박종규 56 사단장이 주요 표적이 돼 숙청됐다.
9. 1차 숙청 결과
3월 8일부터 5월 23일까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전개된 1차 숙청으로 하나회의 권세는 완전히 꺾였다. 무려 18명의 장성들이 군복을 벗었고, 떨어진 별만 40개가 넘었다. 다만 모든 하나회 군인들이 숙청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하나회와 관련된 장성들과 영관급 장교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김영삼과 최측근들은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하나회 고위급 장성들만을 숙청한 후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2차 숙청의 불씨를 댕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10. 사파리가든 회식 사건
7월, 이충석 합참 작전부장이 술김에 벌인 언행이 발단이었다. 대표적인 하나회 장성이자 전두환의 측근이었던 만큼, 그는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숙청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결국 이를 참지 못하고 이양호 합참의장 취임 한 달 기념 회식자리에서 이충석은 "군을 이런 식으로 막 대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리쳤다. 주변 사람들은 이충석을 뜯어말렸고, 이양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11. 2차 숙청, 1군 사령부 초토화
일명 '사파리가든 회식 사건'은 즉시 김영삼과 군 수뇌부에 보고됐다. 이들은 이충석의 언행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나아가 단순히 이충석 개인의 일탈이 아닌 하나회의 집단 저항으로 규정했다. 추가적인 숙청에 미온적이었던 김영삼은 기존 방침을 바꿔 2차 숙청을 단행했다. 우선 사건의 당사자인 이충석이 보직해임과 동시에 강제전역을 당했다. 뒤이어 하나회 군인들이 많은 제1야전군사령부에 숙청의 칼날이 뻗쳤다. 이때 하나회의 저항에 더해 '율곡사업비리'가 숙청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율곡사업비리는 군 전력 현대화 사업인 '율곡사업'과 관련해 국방부 장관과 장성들이 뇌물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조남풍 1군 사령관이 비리에 연루돼 해임된 것을 시작으로 서완수 부사령관, 유회국 참모장, 윤영정 작전처장 등 하나회원들이 잇따라 해임됐다.
12. 영관급 장교들도 숙청
10월에 접어들어 숙청의 범위는 더욱 넓어지고 강도는 세졌다. 하나회원인 김정헌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택형 합참 작전기획본부장, 안광렬 국방부 시설국장, 최기홍 국방부 정책기획관, 함덕선 11 군단장, 김종배 3 군단장 등이 보직해임을 당한 후 전역했다. 다음 해로 넘어가도 숙청은 그칠 줄 몰랐다. 1994년 4월, 김재창 연합사 부사령관, 장석린 국방대학원장, 박광영 육군교육사령관, 최권영 777 사령관, 표순배 9 군단장, 김현수 22 사단장, 길영철 11 사단장 등이 해임됐다. 이에 따라 중장급 이상에 하나회원들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2차 숙청의 시기에 하나회 영관급 장교들도 대거 숙청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13. 완전한 궤멸
김영삼 취임 직후 매우 과감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하나회 숙청은 1994년 10월을 끝으로 마침내 마무리됐다. 숙청 기간은 약 1년 7개월이었다. 하나회가 일순간 풍비박산이 나면서 비하나회 군인들의 세상이 됐다. 그들은 오랜 기간 배제됐던 설움을 씻고 모든 핵심 요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한편 하나회 숙청을 계기로 군부 내 사조직은 좀처럼 발을 붙일 수 없었다. 하나회 숙청 이후에도 사조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적발돼 해체 수순을 밟았다. 만나회, 알자회, 나눔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군부 내 사조직과 정치군인들이 주축이 된 쿠데타 위협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14. 전두환, 노태우 구속
하나회의 최고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것은 전두환과 노태우였다. 하나회 창설을 주도한 것을 넘어 하나회를 통한 쿠데타에 기반해 대통령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회가 속절없이 숙청될 때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할 일이 아니었다. 숙청이 한창일 때와 그것이 마무리된 후에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12.12 책임론이 급부상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쿠데타 피해자, 야당, 민주재야 세력은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촉구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국력 소모'를 이유로 전두환, 노태우와 관련된 혐의를 덮으려 했다.
야당과 민주재야 세력은 포기하지 않고 전국적인 규탄집회는 물론 청와대까지 찾아가 기소촉구 서한을 전달했다. 12.12 쿠데타와 더불어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도 전두환, 노태우에게 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검찰은 계속 미온적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헌법질서 창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논리를 내세워 불기소 처분 결정을 내렸다.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은 크게 반발하며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당대표 국회연설과 논평 등을 통해 해당 특별법을 초법적인 소급입법으로 규정했고,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아무리 야당과 민주재야 세력이 들고일어난다 해도 여당과 검찰, 그리고 김영삼 정권이 동조하지 않으면 전두환, 노태우 단죄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1995년 10월,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비자금 내역을 공개했다. 이는 사실이었고, 노태우는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후 그는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에 소환돼 장시간 수사를 받았다. 혐의가 명백했기 때문에 노태우는 머지않아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내심 야당과 민주재야 세력에 동조하고 있었던 김영삼은 이를 기회로 삼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여당에 지시했다. (특별법은 1995년 12월 19일에 제14대 국회를 통과했고, 12월 21일에 공포, 시행됐다.) 얼마 전까지 '초법적인 소급입법'이라며 반발한 여당은 대통령의 지시에 크게 당황했다.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검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영삼의 의지는 확고했다. 여당은 특별법 제정에 나섰고, 검찰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한 후 수사에 돌입했다. 국민들은 하나회 숙청에 이어 또 한 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두환은 비상이 걸렸다. 그는 처음에는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특별법 제정을 강행한다면 소급입법에 의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 돼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검찰에서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자 전두환은 직접 연희동 사저 입구 골목에 나와 "검찰 소환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유명한 '골목 성명'이었다. 성명 발표 후 전두환은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군으로 내려갔다. 검찰은 전두환의 행동을 '도주'로 간주했고, 곧이어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마자 검찰은 합천군으로 출동해 전두환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집 앞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체포를 막았다. 경찰에서 공무집행방해로 처벌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가 나오자 청년들은 물러섰고, 전두환은 밖으로 나와 검찰 호송차량에 탑승했다. 그 길로 전두환은 안양교도소로 직행, 구속수감됐다. 이후 전두환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김영삼은 하나회 숙청에 이어 최고 우두머리인 전두환, 노태우까지 구속시키면서 군사정권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15. 에필로그
지난 2021년, 미얀마(구 버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얀마의 국민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자 오랜 기간 민주화 투사로 활동했던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해 많은 정부 인사들이 구금됐고, 대신 미얀마 총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 장군 등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시대착오적인 군부 쿠데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재가 잇따랐지만, 군부와 확실히 결별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타협을 한 아웅산 수치 정부가 결국 화를 자초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 사회에서 '쿠데타'라는 용어는 낯설게 다가온다. 쿠데타는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정권을 빼앗으려고 일으키는 정변을 말한다. 쿠데타의 주체는 대개 군부였다. 현재 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선진 국가들에선, 과거처럼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못지않게 민주주의 시스템 및 의식이 정착돼 있어, 군부 쿠데타라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미얀마 사태 등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이와 비슷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 군부는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국가의 모든 대소사를 통제했다. 군부 쿠데타라는 것도 국민들에게 낯설지 않은 용어로 존재했다. "어디서 쿵 소리가 나면 '또 누가 쿠데타를 했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혹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과 같은 시대를 맞이하기까지. 과거 한 지도자의 역할이 주효했다. 바로 군부 정치를 일소하고 문민 통제를 확고히 정착시키기 위해 단행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이 그것이다.
당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건드린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2.12 신군부 쿠데타' 이후 하나회는 군부 내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정권도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면 정권의 몰락은 물론 힘들게 달성한 민주화도 무너질 수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국가 지도자가 의지와 신념을 갖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가 드러난다. 김영삼은 '매우 과감하고 신속하게' 하나회를 숙청해 나갔다. 반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하나회의 머리들을 단칼에 잘라버렸고, 쿠데타 가능성을 감안해 밤샘 근무를 하며 군부대의 동향을 꼼꼼히 살폈다. 일부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고려 시대 무신정변이 왜 일어난 지 아느냐"라며 겁박할 때 그는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고 외치면서 집요하게 숙청을 이어갔다. 지극히 '김영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번에 역사적 과업을 완수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그 당시 김영삼이 하나회로 대변되는 강력한 군부와 타협해 '어색한 동거'를 했다면 어땠을까.군부의 막강한 권세는 지속됐을 것이고, 미얀마 사태와 같은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즉 타협과 동거는 현실의 안온함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위한 국가 지도자의 용기 있는 행동은 비로소 대한민국을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위협에서 해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