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다. 학교도서관 문을 열고 불을 밝히면 서가에 꽂힌 책들이 각자 청구라벨로 개성을 드러내고 있고, 구석진 서가에 반듯하게 머물러 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책들은 오늘 몇명 아이의 손에 닿을지 궁금해진다. 아이들이 하나둘 도서관에 오면 서가에서, 검색용 컴퓨터 앞에서, 좋아하는 공간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재밌는 책 추천해 주세요.” “무섭고 공포스러운 책 추천해 주세요.” “로맨스나 추리소설 없나요?” “사서선생님이 좋아하는 책 알려주세요.” “MBTI 중 용의주도한 전략가인 INTJ에 맞는 책 있나요?”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학교도서관에서 책 읽고 떠들며 재미난 일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어 아직도 도서관이라는 무한의 공간에서 새로움을 꿈꾸고 있다. 두곳 학교를 거치며 그런 나날이 어느덧 11년이나 흘렀다. 한계에 부딪힐 때도 있었다.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갈수록 같은 또래라도 질문 수준이나 독서성향이 달라진다. 그런 어린이들 세계를 두루 알아 간다는 것이 어려웠고, 분야별 포괄적인 책 읽기가 부족해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꾸준히 아이들과 어울리며 함께 책을 보며 사서로서 역량을 키워나갔다.
학교도서관에서 사서가 할 일들은 많다. 전교생을 상대로 원하는 책을 어떻게 찾아 읽을지 알려주는 학교도서관 이용방법 교육부터 독서동아리와의 책 수다, 각종 독서 행사, 책읽기 연간계획 수립 및 작가와의 만남 준비와 진행, 독서인증제, 교과 협력수업, 책 안내와 처방, 북큐레이션…. 이런 일련의 독서경험 쌓기 과정은 아이들을 책 읽는 독자로 성장시키기 위한 사서선생님의 열정이 큰 역할을 한다. 책을 대출하는 업무 또한 단순해 보이지만 아이의 눈빛을 읽어내며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의 성향과 좋아하는 책을 파악하고 다음에 읽을 책을 추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린이의 태도에서 전해오는 책 읽는 모습이 예전과 전혀 달라졌을 때는 사서로서 보람을 느낀다.
그런 뭉클했던 기분을 오래 느끼다 보니 사계절이 변할 때마다 새롭다. 특히 1, 2학년 교실을 직접 찾아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격주 수요일에는 긴장되면서도 아이들의 눈빛 하나하나 설렘으로 가득 담겨 힘을 내곤 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그림책에 더욱 빠져들었고 그런 과정을 늘렸다. 학교도서관 사서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채워 나간다. 책으로 연결된 모든 시도는 다양할수록 좋다.몇년 전 수줍음으로 다가온 아이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잡아준 것은 가장 뜻깊은 기억으로 남는다. 아침 일찍 학교도서관을 찾는 아이는 늘 혼자였다. 아이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아이는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아침마다 도서대출과 반납을 처리하거나, 어린 동생에게 책을 검색하고 찾아주는 도서관 봉사를 하며 즐거워했다. 짧고 재밌는 책을 권하자 아이는 책 읽기도 좋아했다. 방과후 시간에 책 이야기를 들려줬다. 독서동아리에 참여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서관 일을 돕고 또래친구에게 책을 권하는 아이의 변화된 모습에 나 또한 놀랐고, 선한 영향력으로 한 아이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아이들 한명 한명 독서 상태를 파악하고 추천할 책과 독서방법을 알려주는 독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지만, 학교도서관 사서의 근무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아이들이 방학 때 학교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다 보니 직무역량 강화연수도 편하게 참여하기 어렵다. 사서 고유업무 밖의 업무를 맡은 경우도 있다. 정서적, 심리적 어려움이 있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나를 찾아가는 행복찾기’ 활동을 하는 방과후 ‘두드림 학교’를 진행했지만 교사가 아니어서 수업권이 없다. 사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독서치료 수업의 전문성조차 외면당하는 현실이다.
“학교도서관에서는 흥미진진하고도 재밌는 일들이 벌어지죠. 책 속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고민 상담도 하고, 친구와 같이 놀이를 즐기기도 해요. 하지만 이 좋은 것들이 모든 아이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까워요. 모든 초등학교에 사서 선생님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지역신문 또는 책모임에서 도서관 사서에 관해 발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어린이가 평생 책 읽는 독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교도서관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사서선생님이 꼭 필요하다. 더 많은 학교에서 사서선생님이 아이들을 만나고, 전문가로서 충분한 관심과 지원을 받아 교육현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 3.16일자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