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무소를 다니며 다양한 건축가를 만나보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한 분씩 만나 내 상황을 설명하고 내게 잘 맞을지 판단하느라 촉을 세우느라 에너지가 많이 뺏겼다. 상담을 반복할수록 점차 익숙해지긴 했지만, 처음 연락할 때는 여전히 떨리고 용기를 내야 했다. 일곱 번째 건축가를 만나러 가면서는 열 두 명을 만나보고 선택하자 결심한 걸 후회했다. 제발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 이 분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애절함이 작용했던 걸까? 일곱 번째 만난 건축가 분은 유일한 여성분이었는데 이 분이다 싶었다! 상담하는 동안에 언니 같은 친밀함에 푹 빠져버렸다. 이전에 만나 뵌 분들과 비슷한 관점으로 이야기하는데도 남달리 신뢰가 가고 케미가 폭발하는 게 아닌가? 그동안의 상담 중 가장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마쳤는데, 이 사람이 확실하니 뭐 더 이상 얘기 들어볼 것도 없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흥분한 마음으로 속으로 이렇게 외치기까지 했다. ‘저희 이제 집 지어요, 드디어 건축가를 만났어요!!’
그런데 이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진정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실낱 같은 소리가 들렸다. 확신이 옅어졌다. 건축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1시간 남짓한 상담시간을 통해 판단하여 건축가를 선택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느낌이 안 온다고, 느낌이 팍 온다고 선택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뭔지 정리하고 그에 맞는 건축가를 선택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설계비가 적정 수준인지, 주택설계 경험이 많은지, 우리 취향과 맞는지, 소통이 잘 되는지, 자신의 스타일이 너무 확고하여 건축주가 끌려가는 건 아닌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지 등의 항목을 평가해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가장 최적의 사무소를 선택하기로 했다.
여덟, 아홉, 열 분을 만나고 열한 번째 상담에 이르니, 신기하게도 긴장과 부담이 사라졌다. 열 번은 넘게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쓸데없이 들어간 힘이 풀리고 익숙해지는 것인가?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열두 번째 건축가를 만났다. 집짓기 책을 읽다가 괜찮아 보였던 분이었다. 남편 회사 후배의 집을 지은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사실 후배 부부는 자신들의 집을 지은 그 건축가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분이 너무 바빠 만나기 힘들어 주로 밑의 직원들과 소통을 해야 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후배 부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멋지게 잘 지어진 집에 감탄했고, 건축가의 주택 건축 경험이 많은 데다 최근에는 건축가 자신의 집도 직접 지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서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12월 겨울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찾아간 사무실은 꽤 넓었고 직원도 많았다. 일이 많아서 인지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건축가와 상담을 시작했다. 그리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편한 느낌이 있었다. 그동안 많은 건축주를 만나 집을 지은 건축가답게 건축주인 우리에 대한 파악이 빨랐다. '동시에 진행하는 일이 많아 우리 집에 신경을 많이 못 쓰게 될 까 봐 걱정된다'라고 했더니 요즘에는 일이 많이 없어 여유롭다고 안심시켰다. 가장 염려되었던 부분이 해결되자 이 분에 대한 호감이 더욱 커졌다.
그렇게 이 분께 마음이 기울어진 채로 상담을 마치고 돌아와 남편과 마주 앉아 그동안 만났던 사무소 열둘을 놓고 설계비, 주택설계 경험, 소통, 취향, 시간 약속 등 항목을 나눠 평가해보았다.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주택설계 경험이 많으냐, 소통이 잘 되느냐, 설계비가 맞느냐였다. 이에 가장 부합하다고 판단한 분은 열두 번째 건축가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