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영화세상,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
대흥동 사무실을 나와 '토마토 공격대'에서 잠깐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둔산동 '선사시네마' 지하 골방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서점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무가지 문화예술정보 Net을 알게 되었습니다. 얇은 컬러 책자를 가져와서 살펴보고는 이 잡지에 영화에 관한 소식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마침 소식지도 끊어진지라 이 매체의 영화코너를 우리 컬트가 담당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전화를 했습니다. 일종의 협업이었습니다. 전문 디자이너가 있었지만 그쪽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작은 회사였기에 돈을 벌으면 받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커피를 사서 마시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쪽의 작은 오피스텔이 그나마 선사시네마에서 가까워서 종종 찾아갔습니다. 우리 컬트는 영화의 원고를 써서 건네주었고 작은 광고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끼리 서로 힘을 내보자고 했지만 그쪽도 우리도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뭔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에 희망을 가지고 3호와 5호에 참여를 했습니다.
저는 극장가 사람들이란 코너를 만들어서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던 극장 간판과 영사실에 대한 취재를 나갔습니다. 역시 <킹덤> 상영으로 안면을 튼 아카데미 극장과 동보극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쪽 분들은 좀 폐쇄적인 부분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공간이나 작업실에 쉽게 발을 들여놓게 하지 않았습니다. 친근하게 인사를 여러 번 드리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제 27년이 지나고 나니 두 개의 직업은 사라진 직업이 되어버렸네요. 지금도 건강히 살아계셨으면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원래 취재 원고는 많았는데 아쉽게도 편집이 되어서 짧은 내용만 실려서 아쉽네요.
영화관을 가면 언제난 영사기가 차르르르 돌아가고 뿌연 연기처럼 한줄기 투명한 빛이 커다란 스크린으로 쏘아진다. 하늘을 날기도 하고 달콤하고 진한 키스신이 나오기도 하고 숨 막히는 자동차 추격신이나 우주를 비행하기도 한다. 저 영사실에서 일을 하면 공짜로 영화도 보고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나도 나중에 영사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시네필이라면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영사기사 역시 직업인. 실수는 치명적이다. 그 당시 취재를 했던 영사기사님의 50대 중 후반의 연배가 이제 세월이 흘러 내가 되었다. 3년 전 지금은 대전 아트시네마로 변한 동보극장에서 디지털 영사기 때문에 상영하지 않는 먼지가 쌓인 영사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고 보니 4월 5시간 가까이 되는 심야공포영화 <킹덤> 상영 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분명 물어본 거 같은데 말이다. 이제 나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1998년 연말로 돌아가본다. 호기심 소년 토토가 되어서 영사실 문을 들어간다. 차르르르... 커다란 두 개의 필름통이 돌아가고 있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를 우리는 기억한다. 시간의 빛과 어둠이 만들어 낸 깊은 주름 밑으로 보이는 따뜻한 미소의 소유자. 꼬맹이 토토의 어린 시절을 온통 영화로 물들이고, 때로는 티격태격 혼내기도 하지만 토토에게 영화사랑을 심어 주셨던 그 넉넉한 콧수염의 영사기사, 그러한 알프레도가 우리의 곁에도 있다. 동보극장의 류춘성 영사기사(57).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주름살 너머로 쑥스러운 듯 털털거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1965년 공주극장 간판부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였다. 영화 보는 재미로 영화관을 드나들다 23세부터 영사일을 배웠다고 한다. 처음 영사시를 다루어 상영했던 제1호 영화는 <과부>(이미자, 윤봉균 주연)란 영화라며 잠시 옛 추억을 더듬어 보였다. 오락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당시만 해도 무명 손수건을 흠뻑 적시며 울거나, 먼지 묻은 고무신을 신고 몰려드는 시골 아낙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고생하며 틀었던 영화는 20여 년 전의 <마스크>라는 입체 영화였는데, 기술적으로 두 개의 영사기를 돌려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영화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폭군 연산>(1962년)과 <성춘향>(1961년)을 꼽았다. 가족 이약기를 묻자, 젊은 시절에는 영사일에 대한 아버지의 반개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지금, 국가 기술자격증인 영사기사 1급 자격증과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3남 1녀의 가장으로서 떳떳한 모습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휴일도 없는 극장에 항상 근무해야 하는 관계로, 주위의 사람들이 상을 당하거나 혼사를 치를 때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사실 내부는 손때 묻은 부품가 기구로 가득했고,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지금은 거의 안 본다는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류춘성 기사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화려한 영화판의 세계, 그 이면에는 더 많은 삶의 애환과 진실의 손길들이 숨어 있음을 느낀다. 스크린 위러 아름답게 피어나는 영화는 보이지 않는 이 분들의 노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대전 극장가의 다른 여러 영사기사님들에게도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글& 사진 황규석/CULT - 문화예술정보 Net 3호(1999년 1월 1일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