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한 남자가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어느새 5시 반 약속 시간 30분 전이다. 집은 거의 정리가 끝나 휑한 모습이었다. 너무 썰렁할까 봐 낮에 외출해 쓰레기봉투를 사 오며 작은 꽃다발 2개를 시우는 사 왔다. 하얀 안개꽃 한 다발 그리고 노란 수선화는 작은 컵에 꽂아 놓았다. 그나마 기분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겉옷을 벗으려고 어깨를 펴니 속이 메스꺼웠다. 갑자기 머리가 깨지듯 아파왔다. 시우는 주머니 속 하얀 약봉투를 마른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 약 봉투였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벌컥 마셨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막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말없이 주방 테이블에 녹색 소나무 그림이 있는 식탁보만 깔아 놓았다. 시우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했지만 눈이 퀭한 게 무섭게 보였다. 15년을 써온 빛바랜 클리블렌드 인디언즈의 짙은 남색 야구모자를 고쳐 썼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딩동! 보라색 카디건을 한 남지혜였다.
"안녕, 어서 와!"
"어... 오빠! 나... 나야"
"고마워~"
"응, 와야지 당연히"
주방으로 가려는 시우를 지혜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시우는 말없이 멈춰 섰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던 전 여자친구는 커다란 눈이 예뻤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우가 처음부터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빠져들고 미래를 약속했을 때는 시우가 그녀를 밀어냈다. 지혜는 계단을 올라오는 구두 소리에 허리를 풀어주었다. 눈가의 눈물 자국을 훌쩍이며 급하게 닦았다. 김 선생님이 들어왔다. 하이 소프라노 톤이었다
"내 친아들 같은 시우!"
"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선생님은 시우가 고아원에서 퇴소 후에도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을 내주기도 했다. 엄마 같은 분이었다.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병원에 다녀와서 술을 마시고 선생님께 전화를 했었다.
꼭 1년 전 한 밤중이었다. 3월 중순 노란 산수유 꽃이 핀 뒤 내린 꽃샘추위에 함박눈이 내린 날이었다.
"시우야..."
"선생님... 그래 별일 없지?... 괜찮아?"
"선생님, 엄마라고 불러봐도 돼요..."
"그럼 되고 말고 불러보렴"
"엄... 마..."
상규가 제일 늦게 도착했다.
"형, 미안해요. 늦었죠?"
"아니, 괜찮아!"
"집사람이 일이 생겨 아이들 보느라고요. 이거 연지, 하연 편지예요"
시우가 상규에게서 받은 연지의 편지를 펼쳐보았다.
'시우 삼촌 사랑해요!♡♡♡ 영원히... 고마워요!'
중학생인데 상규를 닮아 키가 컸다. 연지 동생인 초등학생인 하연인 '삼촌, 사랑해, 미워'라고 짧게 색연필로 썼다. 종이를 접으니 '삼촌 잊지 않을게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암호처럼 구석에 적어 놓았다. 네 사람은 테이블에 앉았다. 시우가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사람씩 따라주었다.
"자 우리 한 잔해요~" "....."
지혜, 선생님, 상규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규가 그 무거운 침묵을 깼다.
"어, 형 우리 시우형! 건배!"
지혜는 눈물을 꾹 참고 와인 잔을 시우와 부딪혔다.
"오빠, 건배..."
김 선생님은 입술을 깨물고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우리 모두 오래오래 기억해요. “
그리고 시우를 뺀 세 사람은 서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서로 바라보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멀뚱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규야! 너 기억 냐냐?
형이 너랑 강원도 여행 갔던 날 텐트 치고 자는데 바닷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자는데 텐트 날아갔잖아! 하하하 나 그때만 생각하면 웃겨서"
"아 그럼 생각나지, 역대급이었지! 암. 내가 소나무 아래 치자고 했는데 형이 자꾸 바위 뒤 모래사장에 치자고 해서... 선생님, 우리 형님 엉뚱한 거 아시죠?"
"네 그럼요, 제가 시우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고아원에서 가져다준 책들을 다 재밌게 읽고는 나중엔 전부 쓰레기라고 태우고 싶다고... 그러더니 뭐더라 앞으로 청소부가 꿈이라나...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위대한 직업이라고 했지 뭐예요. 후후"
그렇게 추억을 이야기하며 작은 집안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지혜는 오랫동안 시우의 방안 곳곳을 커다란 충혈된 눈에 담았다. 저기 못 자국이 난 벽면에 태국여행을 같이 갔을 때 찍은 사진이 걸려 있던 자리였다. 시우와 함께 자유여행을 떠났던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고아원에서 눈이 먼 아기 장님 코끼리를 보고 시우는 크게 소리 내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 코를 쓰다듬으며 바나나를 주는 시우와 다혜의 손을 더듬는 늙은 코끼리를 어루만지며... 시우와 사귀면서도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다.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시우와의 시간을 추억했다. 그렇게 시간이 한 시간이 금방 화살처럼 흘러갔다. 아니 사라졌다.
"저, 모두들 오늘 저 시우의 종강 파티에 와주셔서 고마워요. 잊...지 말아야겠죠.
영원히. 자신은 없지만.... 아니 잊어주세요. 깨끗하게."
"잊지 못할 거야.. 아니 오래오래 기억할게...
"오빠, 고마웠어 “
”형, 형은 정말 멋졌어! “
시우는 한 사람씩 한참을 꼭 안아주었다.
"자자! 선생님, 지혜 씨 이제 웃어요. 우리도 나중에 가잖아요. 좀 빨리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거니까요"
상규가 핸드폰을 얼굴 위로 들었다.
"자, 여기 보세요! 형! 고개 좀 더 지혜 씨 웃어요 예쁘게~ 그렇죠
역시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 하나 아도 울 김치가~ 신김치가!"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떠나갔다. 가져온 와인, 컵, 남김없이 치웠다. 깔끔하게 흔적도 없이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현관문은 조금 열어두었다. 이제 홀로 남겨진 시우가 온전히 이겨내야 할 시간이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셨다. 이 침묵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적막감도 이제 추억 아니 그리움이 될까? 잠깐 선잠이 들었나 보다. 잠에서 깨어보니 침대였다. 입술이 말랐다. 어느새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그리고 변호사가 방 안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되었다. 변호사가 서류를 보여주었다. 시우가 사인을 하고 의사도 사인을 했다.
"시우 씨, 이제 마지막 시간입니다."
"네 고생이 많으시네요..."
"제 각막과 신장은 기증이 되겠죠?"
"네 물론입니다."
"화장 후 바다에 뿌려주세요..."
"고맙습니다."
"아, 참 제 정리한 통장의 잔고는 제가 자란 고아원에 바로 보내주세요."
"사망진단서가 나온 후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파란 앰플을 똑 깨고 수액을 갈아 끼었다. 이제 그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편안히 주무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액이 한 두 방울 아래로 떨어졌다. 시우는 주위를 보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한순간이었다. 그도 처음엔 자신을 낳고 그냥 버린 부모를 원망했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급성 혈액암이 걸리고 나서부터였다. 내 뜻대로 태어나지 못하고 버림받았지만 갈 때는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이것은 내 복이요 받아들일 만한 운명이라고 수긍하였다. 가족이 있는 다를 사람보다 아무도 없는 자신에게 달려든 암이 고마워지기까지 했으니. 지난 6개월간 너무 힘들게 항암치료를 받았다. 담당 의사는 희망이 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그냥 그를 위로하는 말이었음을 알았다. 시우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변호사를 만나 안락사 신청을 했다. 심사를 통해 법원의 판결이 한 달 전 떨어졌다. 허락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43세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모든 게 감사한 일이었다. 좋은 친구도 만나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시우가 쓴 3권의 책이 나왔다. 소설집 1권, 수필집 1권, 시집 1권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즐겁게 살았다. 그에게 최고의 기쁨이었다. 지혜는 또 어떤가. 예쁘고 과분한 여자였다. 지혜 때문에 그도 삶에 대한 욕심을 한때는 내기도 했었다.
"지혜야, 하늘의 별이 반짝반짝 빛나게 보이는 건 왜 그런지 아니?"
"글쎄, 나 좀 데려가 줘 아닐까”
"그 별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움이 숨어 있기 때문이래..."
"오빠, 나랑 결혼하자.."
"너 나 책임질 수 있어?"
"응, 내가 책임질게"
"나 성격 괴팍한데 다혈질이야!"
"나도 한 성격해, 나 여변이야~"
"여변? 무슨 말이야?"
"여자 변태!"
두 사람은 강원도 정선 육백마지기로 3년 전 오토캠핑을 가서 끝없이 푸른 반짝이는 별을 보고 사랑을 약속했었다. 시우는 몽롱하게 떠오르는 추억의 파노라마를 기억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로 가는 별이 되는 여행을 시작하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어. 행복하고 고마운 여행이었어. 시우는 자신이 운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늘길의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의 작은 별이 되는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신발끈을 다시 조여 맸다. 시우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뒤에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떠나는 날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어느 날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 한 남자가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잠이 몰려왔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은 무거운 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잠들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시우의 동공을 검사했다. 잠들듯 떠난 시우의 혈압과 맥박을 쟀고 시간을 기록했다.
2023년 12월 25일 밤 1시 12분.
사망진단서의 사인을 마쳤다. 변호사도 사인을 하고 입회한 경찰관이 문을 열어주자
곧이어 구급대원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그의 집은 이제 텅 빈 빈 집이 되었다.
모든 것이 말없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