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사랑, 나의 영화(1)

27살 씨네필의 당돌한 자서전

by 황규석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좀 괴상한 행동을 즐겨하는 기인이다. 나의 서울 영화여행은 영화자료 수집과 관련이 있다. 이 영화자료라는 것은 극장 앞에 놓인 영화프로그램이 담긴 - 카탈로그는 여러 가지 상품을 소개한 얇은 종이 책자를 말하는데 즉 영화를 닮은 아니고 전단지라고 하자니 고지식하고 골동품이 느낌이 난다 - 사진 화보를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엽서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혜화동 동숭아트센터 지하의 KINO에서 구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었다. 그곳에 들러 여로 영화 관련 자료들을 구경하고 엽서도 구매하려고 서울에 종종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영화 전단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자면 꽤 길어진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느껴온 영화관에서의 환상과 흥분감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춘기 청소년이던 중, 고교시절의 나를 더욱 영화관으로 가게 하였고 영화에 관한 것으로 내몰았다. 전부터 책이나 우표, 상표 등 수집과 스크랩에 취미가 있었었다. 말이 별로 없던 내가 영화를 보고 난 뒤 밀려오는 벅찬 감동 - 설사 그것이 3류 액션, 멜로, 무협영화라고 해도-을 다시 느끼는 시간과 장소등을 찾고 있었다.


그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영화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트에 느낌과 즐거리를 적기 시작했고 장면을 영원히 떠올리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대한 산진이 필요했다. 그리고 배우와 감독을 공경하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해 알아야 했다. 모든 영화는 나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병에 걸린 것이다. 이거 이야기가 이상하게 나의 찬란했던 그리고 열정적이면서도 정말 별거 아닌 영화사(?) 관한 이야기로 흐르고 있구나... 하지만 어쩌랴. 이미 바지춤이 흘러내리고 입에서는 침이 튀기 시작하는 걸. 매듭을 풀고 이야기를 시작할까? 그냥 흘러가고 생각나는 대로 어쭙잖은 나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선전지라고 부르는 극장에서 나눠주는 영화 전단지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영화의 '영'자만 나오는 나와도 닥치는 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백방으로 다녔다. 휴지통도 뒤졌다. 지금처럼 전단이 많이 깔끔하게 많이 나오지도 않았다. 발에 밟히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영화전단지도 주웠다. 지방에서는 설날, 구정, 추석 연휴와 크리스마스 등 대목을 맞아 상영하는 영화에 주로 전단지가 많이 편중되어 만들어졌다. 반면에 신문에 연예정보란에 나오는 영화 관련 기사는 내가 신문 배달을 오래 했고 신문 읽기를 좋아해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주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파에 영화 기사가 나왔고 나는 주말마다 각종 신문을 하나씩 사러 다녔다. 그래서 그 영화기사를 칼로 잘라 스크랩했다. 텔레비전 시간표에 나오는 영화 프로그램도 관심이 가고 흥미로워서 잘라냈다. 신문을 보는 친구의 집에 까지 가서 낮 두껍게 일주일치 신문을 모서 칼과 자로 영화광고며 여러 가지 기사를 잘라오기도 했다. 아 염치도 없었고 참 뻔뻔했다. 아! 그 쑥스러움을 무릅쓴 뻔뻔함의 진원지는?


그 행동은 내 삶의 빛깔 - 회색빛일까 - 을 푸른색 혹은 빨간색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벽보를 뜯기도 했다. 그리고 극장에 영화를 보다가 몰래 뒤에서 커다란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을 사진기로 찍기도 했다.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두 번째로 보면서. 카메라는 청소년 잡지의 통신 판매란을 통해서 신문 배달을 한 돈을 모아서 샀다. 어두웠지만 플래시도 터트리지 않고 코니카 필름 카메라로 인상 깊은 장면을 찰칵하고.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코만도>, 리처드 기어의 <브레드 레스>, 사춘기 나의 짝사랑 배우이자 로망이었던 소피 마르소의 <나이스 줄리> 등의 영화다.


난 이후에 더욱 대범해졌다.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골목골목을 돌면서 목(?) 좋은 자리를 골랐다. 당시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풀통과 말아진 영화포스터를 가지고 담벼락에 붙이는 극장의 영화 선전부가 있었다. 그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찍으러 다닌 것이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참 별나다 벽보를 사진 찍다니 뭐 하는 학생인가 했으리나. 그렇게 찍은 사진은 영화의 스틸 사진처럼 나에게 색다른 감동과 즐거움을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척 대수롭지 않은 척하는데도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땐 "후에 날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두고 봐라.." 하며 이를 악(!) 물고 영화 포스터가 붙은 담벼벽에 가까이 다가가 태연하게 늘 하던 일처럼 사진을 찍었다. 지금처럼 줌 렌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구도도 안 맞고 사진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필름을 동네 전파사에서 하는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찾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칼라로 나오는 하나의 창작품이었다. 누구도 없는 나만 가지고 있는. 그리고 돈이 그때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담배는 원래 생각이 없었고 친구들끼리 가는 당구를 배울 시간도 흥미도 없었다.


동네 전파사의 사장님도 매주 필름을 맡기고 이상한 영화 벽보 사진을 찍어 2~30장씩 찾아가는 스포츠머리를 한 학생을 이해하기 힘들어했으리라. 그런 창피함을 견디고 계속 뭔가를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보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1년 정도밖에 가지 못했다. 어느 주말 자전거를 타고 사진을 찍으러 먼 동네까지 갔다가 운동장에 세워두고 쉬던 때 자전거와 카메라를 누군가 훔쳐갔기 때문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공을 차는데 끼어 놀다가 돌아오니 자전거와 카메라를 도둑을 맞은 것이다. 누가 그런 걸 업어갔을까. 그때는 그랬다. 1987년이었지 아마...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했다. 잡기만 해봐라. 그 나쁜 XX! 그냥 물건을 돌려받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그냥 단순하게 말했으리라.


신문에 나오는 영화광고를 처음에는 오려서 노트에 붙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빛이 바래고 종이가 누레지는 약점이 눈에 띄었다. 비닐을 열처리하여 붙이는 코팅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다니던 대전 대신고등학교 앞의 문구점에서 브루스 리, 이소룡과 내가 제일 좋아하던 J에게의 가수 이선희의 브로마이드 책받침을 사 모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 나는 이소룡과 이선희의 광팬이었다. 코팅된 제품은 반짝이기도 하고 물에 젖지도 않고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신문의 영화 광고를 하얀 16절지에 붙여서 코팅 가게 맡겼다. 당시 코팅 가격이 장당 100원으로 기억된다. 나중에는 영화제목, 배우, 카피 등을 나름대로 새롭게 구성해서 오래 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걸 매주 문구점에 맡겼다. 비용이 꽤 들었다. 참고서를 산다고 돈을 받아내서 몇 권은 안 사기도 했다. 고3 때는 새벽 신문 배달을 해서 돈을 벌었으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찌라시라 불리던 영화전단지를 모은 책장(左) 영화잡지 스크린에 보내려고 집에서...

선데이 서울, 주간 경향 등 이름만 들어도 감회가 새로운 연예정보지도 내가 영화 관련 기사와 정보 사진을 모으는 창구였다. 그걸 구하려고 대전역 맞은편 대동이 헌책방 거리를 돌아다녔다. 돈이 생기는 데로 가서 여배우 사진이 표지에 있는 헌 잡지를 권당 100원 , 200원에 샀다. 기사를 잃고 사진과 기사는 잘라 모아 스크랩을 했다. 그걸 나는 헌팅이라고 불렀다. 영화 헌팅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정가의 1/7 가격으로 많게는 수십 권씩 샀다. 서점 아저씨들의 이상한 시선! 나를 변태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배우 수영복 사진은 사실 관심밖이었다. 외국 영화배우의 사진이나 기자회견 촬영장 이야기 등이 더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그 헌책방에 'Newsweek'나 'Time'지 등 영어잡지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흘러간 잡지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보물창고였다. 그 잡지들도 안을 들여다보며 사들였다. 1976년 작, 젊고 아름다운 시고니 위버 주연의 "킹콩" 스틸사진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심봤다라는 말이 나왔다. 거대한 킹콩의 손바닥에 흘러내린 그녀의 모습 정말 뿅 갔다. 나중에 킹콩의 순정을 알았다. 그도 인간의 욕심에 희생된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신문의 영화광고를 잘라서 코팅을 해서 스크랩 북에 모음


고교시절 나의 우상은 이선희와 이소룡. 한 사람은 노래로 한 사람은 액션으로 날 울리고 감동시켰다. 이선희의 팬클럽 '홍당무'에 가입을 했다. 매달 손바닥만 한 팬클럽 소식지가 왔다. 거기서 다른 친구들과 펜팔을 하기도 했다. 제1회 소년소녀가장 돕기 라이브 콘서트를 서대전사거리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했을 때는 직접 표를 사서 참가하여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때 반주를 한 그룹이 건아들. 심장이 뛰었던 너무 아름다웠던 추억. 동네 이발관의 벽에 붙어있던 이소룡의 영화스틸 사진은 영화 <맹용과광> (The Way of the Dtagon>. 로마의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척 노리스와 겨루는 사진이었다. 난 그가 한국 사람인 줄 알았다. 이름이 한국이름이니까.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꽤 되었고 홍콩에서 태어난 사람이란 걸 곧 알았다. 그를 더 알기 위해 서점에서 그의 전기와 쌍절곤 백과를 사서 탐독했다. 물론 쌍절권을 사서 정말 연습을 많이 했다. 지금도 쌍절권을 돌리는데 어려움이 없고 나름 자신이 있다. 교재를 보고 연습도 하고 유리창도 깨 먹고 말투와 표정 소리까지 연습을 했다. 팔뚝과 머리에 멍도 많이 들었다. 당시 맞아서 뇌세포도 많이 맛이 갔을 것이다. 그 충격으로 아직도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1988년 대학에 들어가서는 서클 활동을 기대했다. 바로 영화동아리 '스크린'이다. 그러나 큰 기대만큼 내용아이 없었다. 영화를 할인해서 천 원에 보는 것 빼고는 그다지... 또 나는 자원해서 군대에 들어갔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여 사랑하는 국가와 가족 친구들을 지키겠다는 나름 큰 뜻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군에서 제대한 형이 복학을 해야 했고 음악을 전공한 누나의 학비도 부담되는 것 같아 나라도 휴학을 하고 군에 대에 가는 것이 집안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위와 같이 허튼짓을 하던 사람이 군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갔으니 얼마나 극장에 가서 영화가 보고 싶겠냐고... 그리고 영화자료 수집도 못하고 말이야. 내 방에서 주인의 손길을 잃은 나의 보물들 각종 영화자료들 전단지, 광고물 등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아니라서 건드릴 수도 없고 스쳐 지나가는 영화들이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다. 30개월의 단절의 시간.


그런데 군에 가서 나의 영화와의 인연(?)은 정말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내 별명이 뭐였는지 아나? 못 믿겠지만 '람보'였다. 우람한 체구의 실베스터 스탤론이 연기한 버림받은 베트남 전쟁영웅 그리고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반항하는 그 람보. 난 우람한 체구도 아닌데 람보였다. 군 후임병들은 재미있게 보람이 아빠라고 불렀다. 그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은 이렇다. 이등병을 막 달고 해발 850m의 강원도 화천 산골 만산령을 고개를 넘는 야간행군을 했었다. 헉헉거리며 무거운 완전군장을 하고 말이다. 첫 행군의 낙오로 난 완전히 소대에서 찍혀서 정말 많이도 맞았다. 아침부터 집합당해서 구타를 당했다. 자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어디 부러지고 끊어지지는 않았다. 통뼈라서 맷집은 자신이 있었다. 어느 날 비가 오는 숙영지에서였다. 나보다 후임병도 우리 소대에 들어왔다. 밖에 나가지 않고 텐트에서 있을 때 장기자랑을 했다.


난 순전히 덜 맞으려고 오버 액션을 했다. 나는 극장 예고편을 내 입으로 흉내를 냈다.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헬리콥터 소리, 총소리, 포탄이 터지는 소리는 냈다. "두구두구두구 탕 타탕~~ 콰콰강!!!(M60 기관총) 으악~~~~ 부타다당(진흙탕 오토바이) 차이익~ 칙칙, 로져 칠 메리 세븐 메리(무전기) 아임 고잉 투 킬 You!(람보)...." 스피커에서 나오는 실감 나는 전투장면을 입으로 재현한 것이다. 거기다가 악당의 음흉한 비웃는 소리도 추가했다. "으하하하핫!" 눅눅한 텐트 안에서 영화 <람보>의 예고편을 방송하듯이 연기를 한 것이다. 물론 이것저것 섞어 꾸며낸 내용이다. 이야 반응 정말 빠르데. 누구는 라디오를 켜 놓은 줄 알았다나.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황규석이 재능이 있다. 쏟아지는 앙코르 공연. 선임에게 참 많이 불려 갔다. 그리고 중대, 대대의 회식 사회도 내가 보았다. 연대장이 주최한 명정 간부 회식에도 불려 나가 이런저런 공연을 했다. 쏟아지는 앙코르 공연.


나중에는 우정의 무대 출연, 결국에는 하사를 달고 사잔 문선대(문화선전부대)의 사회자로 3~4번의 파견 공연까지 한 것이다. 그때부터 람보가 되었다. 그때 람보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정말이다. 정확히 입대 후 362일 만에 첫 휴가(14박 15일)를 나와 대전 집에 왔다. 그동안 먼지가 쌓인 스크랩북과 파일을 아련하게 보듬을 수 있었다. 긴 공백기간이 너무 아쉽고 또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수동적일 수도 있는 수집가 즉 콜렉터의 편집광적인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또 지켜진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아직 유효하지 않을까. 고 3 담임선생님께 허풍을 떨었다. "유명한 영화감독이 돼서 선생님을 찾아뵈겠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 사실 난 영화도 만들고 또 영화 광고를 하고 싶었다. 신문에 실리는 영화광고 말이다. 흑백으로 나오는 영화광고를 아직도 스크랩하고 있지만 흑백사진의 여운처럼 그 무엇인가 끌리는 영화광고. 그리고 영화를 단 몇 마디로 표현해 내는 광고 문안. 그것을 만들고 싶었다. 잡지에서 보니까 당시만 해도 큰 극장에 기획실이 몇 군데 있었고 그 광고를 몇 사람이 다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50만 원이면 영화기자재를 살 수 있고 소형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신문에서 보았다. 막연하게나마 나중에 영화를 하겠다, 만들겠다 속으로 외치고 다녔다.


내가 속한 이기자 부대 27사단은 88 올림픽 전에도 또 이후에도 부대 연병장에서 데모를 진압하는 충정 훈련도 종종 했다. 올림픽 전에는 또 정신교육을 받고 유언장을 쓰리고 해서 썼다. 그 유언장에는 내가 죽으면 내가 모아둔 영화자료와 써니 이선희 사진을 가장 친하고 또 불쌍한 동창 친구인 Y에게 맡기겠노라고 쓰기까지 하였다. 참, 에피소드 하나가 또 생각났다. 처음으로 충무로라는 곳을 간 것은 90년 12월 제대 후 91년 초봄으로 기억이 된다. 뭐 다른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난 좀 감격해 있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한국영화의 메카 충무로구나. 그런 기분이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그때 누군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왔다. "혹시 이기자부대... 람보 아닙니까?" 내가 맞다고 하자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물건을 배달하다가 날 알아본 그도 이기자 부대 출신이었다. 내가 사회 본 공연을 기억한 것이다. 우리 중대 막사 앞에서 나보다 군 생활을 먼저 하고 먼저 제대한 분이 내 얼굴을 기억해 인사를 건넨 것이다. 그것도 충무로 영화, 인쇄골목에서 말이다. 처음 가본 서울에서 그것도 길거리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적잖이 나도 많이 놀랐다. 함께 있던 친형도 얌전했던 나를 다시 봤다고 요즘도 이야기를 하곤 한다.


- 월간 "영화세상" 27호(1995년 12.25)에 실은 글을 발췌-

2부는 내일 발행됩니다.....

이 글이 실린 월간 "영화세상" 27호 (19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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