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사랑, 나의 영화(2)

27세 씨네필의 당돌한 자서전

by 황규석

대학에 입학한 1988년 88 꿈나무 학번이던 난 그해 1학기만 서둘러 마치고 남들보다 아주 빨리 6월 육군 보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그리고 병장 진입 전 하사관 교육대에서 6주를 훈련을 받고 일반하사 분대장이 되어 자대에 복귀한다. 그리고 군무대회의 안무와 지휘를 하여 대대경연 1등, 연대 경연 1등, 사단 경연대회 1등으로 우리 군무팀 전원 표상휴가를 가게 하였다. 그리고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진행하는 MBC <우정의 무대> 출연과 사단 문선대 사회자로 발탁되어 사단대 부대로 위문공연을 파견을 다녀온다. 1990년 12월 제대 후 복학하기 전까지 6개월간 어머니가 일하는 돼지와 소를 도축하는 도축장에서 일을 했다. 어머니가 부산물인 선지 장사를 했는데 그 일을 도왔다. 왜? 먹고살기 위해서다. 아직도 나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가 정수리에 쇠망치를 얻어맞고 "쿵!" 쓰러진 소의 목에 올라탔다.


구멍이 뚫린 소의 대가리에 쇠 꼬챙이를 넣고 쑤셔댔다. 눈알은 돌아갔고 혀를 쑥 내밀었다. 제발 고통 없이 빨리 숨이 끊어지기를 바랐으나 소는 죽기 살기로 큰 몸을 흔들며 바둥거리고 발길질을 했다. 가끔 내가 쇠망치를 소의 대가리에 내리치기도 했다. 그리고 모가지를 자르기 전에 목에 구멍을 뚫어 콸콸 쏟아져 내린 피를 받아 선지를 만들었다. 소와 돼지의 배를 갈라 나온 내장과 부산물을 선지와 함께 도매 정육점에 배달하고 팔았다. 죽은 어미 소의 배에서 살아 나온 새끼 송아지가 어렵게 일어섰으나 죽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소는 자신의 죽음을 아는 듯 그 피비린내 진동하는 커다란 자신의 학살장에 오면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려고 한다. 돼지는 지하의 우리에 가두어졌다가 전기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 뒷다리에 쇠사슬 도르래에 걸려 지상으로 올려져 해체가 된다.


인간만큼 또 잔혹한 동물이 있을까? 일을 하지 않는 주말에는 나는 영화를 보러 다녔다.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다시 그 도축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나에게 보이는 그림들이 영상화되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하였다. 그런데 도축장에 들어온 가축,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무엇일까? 그렇게 일하며 모은 돈으로 소원이던 코팅기계(라미네이팅)를 구입했다. 16절과 8절 사이즈의 영화전단지(선전지) 코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1991년 봄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보존성을 높여 자료를 안정적으로 수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심리적 안정감으로 보다 안정적인 영화사랑과 일(?)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91년 가을, 대학 목원대학교 불문한과 1학년 2학기에 다시 복학한 후 한동안 전공 공부에 열중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영화에 빠져들었다.


나는 한국인이 만든 우리 영화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영화도 우리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고 발생부터가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불운하였다. 그리고 겉멋과 교묘한 상술로 포장된 예전에 내가 감동받았던 영화에 대해 불신이 생겼다. 할리우드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막연한 환상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곰곰이 현재를 생각해 보았다. 김치를 먹고 쌀밥을 먹으며 한반도에서 생활하고 이 땅에 묻혀야 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서울 H대 철학과에 다니며 구치소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시위 때문에 도망 다니던 고향 동창 친구 L의 말이 떠올랐다. 미 제국주의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었다. 하지만 군복을 벗고 환상만 쫓아오던 나를 뒤돌아보니까 그의 판단과 행동이 부분적으로 옳았던 부분도 느껴졌다. 이제 내가 고착된 의식의 틀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3년은 나에게는 잊지 못할 해이다. 그해 여름에 스크린 잡지 광고를 보고 5회 여름영화 캠프(충주 오로라밸리)와 1회 작은 영화여행(포천 베어스타운)에 직접 참가했다. 배우들과 감독 그리고 영화사 사람들 그러니까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보다 더 영화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질퍽하고 끈끈한 목소리를 들었다. 비디오카메라로 직접 단편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하고 찍어보기도 했다. 영화는 장난이 아니고 재미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힘들었다. 그리고 월간 스크린 93년 8월호 독자 게시판에 내가 관제엽서로 써서 보낸 "영화세상을 만들어 봅시다"란 몇 줄이 실렸는데 14통의 답장 편지(엽서 포함)가 두 군데 영화갬프를 다녀오니 학교 과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지금은 미국에 유학 중인 이상우 친구가 보내준 <양들의 침묵> 스틸사진과 부산의 김명선 친구가 보내준 회비 2천 원 등 정말 고맙고 새로운 발견이었다.


처음엔 그냥 한 두 명과 영화자료 교환과 편지를 나눌 심산이었다. 그렇게 많은 연락이 올 줄 몰랐다. 워드도 작성할 줄 몰라 타이핑을 복사집에 돈을 주고 부탁했고 제본도 그때 알게 되었다. 당시 학교 생활도 문제가 있던 터라 탈출구가 필요했고 오직 뭔가 해보자라는 열정으로 덤벼들었다. 3번째 회지가 나오고 서울에서 전화가 와서 11월 서울 동국대에 올라갔다. 관객집단 '씨네아이'는 영화캠프에 갔던 사람들이 그 캠프의 주최자인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곳의 의도로 모여 만든 모임이었다. 지방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상경해서 창립모임에 참석했다. 그때 지금은 영화인협회 스크린쿼터 감시단 일을 하였고 지금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에서 일하시는 김혜준 사무국장님을 알게 되었다. 영화사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님, 동국대 영연과의 정재형 교수님의 얼굴도 보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만든 4권의 '영화세상' 회지를 들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좀 거창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다. 회지를 지금과 비교해 보면 참여 회원도 적었고 제작 수준도 낮았지만 참여도나 열정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낳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2월에는 관객집단 '씨네아이'영화상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거기서 거장 임권택 감독님도 처음 뵙고 이야기를 들어보는 영광과 기쁨을 가졌다. 비록 감독님은 나를 모르고 지나쳤지만 말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서울과의 인연은 시작이 되었다.

여름영화캠프에 참가했던 본인(왼쪽 2번째)


1994년 4월 난 4학년 등록을 포기하고 휴학을 했다. 다시 어머니의 일터로 일을 나갔다. 신문 광고를 보고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설 영상작가교육원 기초반에 원서를 냈다. 일주일에 두 번씩(화요일, 목요일) 서울 충무로역 동국대 후문 쪽의 강의실로 가서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강의를 들었다. 겨울철을 빼면 도축장에서의 일은 새벽에 시작하지만 오후 2~3시면 보통은 끝나기 때문에 오후의 시간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시나리오에 관심을 둔 거은 원래부터 잡문 쓰는 것을 좋아했고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작업이면서 문학성과 영상이 어우러지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기 때문이었다. 서울 강의가 있는 날은 가방을 메고 일을 마치자마자 대전역에서 통일호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갔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당시 학생증을 제시하면 종로 3가의 복합관 서울극장과 신사동의 시네마천국 극장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제휴가 맺어진 상태여서 그 점을 활용했다. 그러면서 서울의 극장가가를 돌아다니며 그 위치를 꿰뚫게 되었다.


종로3가역에서 내려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을 둘러보고 전다지를 챙기고 좀 더 올라가서 코아아트홀의 자료도 수집한 뒤에 영화전문점 칸느도 둘러보는 코스다. 그리고는 명동의 중앙극장과 국도극장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복합관의 형태로 탈바꿈한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그리고 충무로역 앞의 대학극장에 와서 프로그램을 구한 뒤 동국대 뒤편 남산 자락의 영상작가교육원의 강의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저녁을 많이 때웠다. 돈을 매달 갚기로 하고 형 친구의 카드를 이용해서 산 486 PC의 한글 프로그램으로 난 스스로 '영화세상' 회지의 편집도 직접 하게 되었다. 강의는 재미있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이미 작가로 등단한 사람, 작사가, 동화작가, 고위 공무원, 고등학교 선생님, 무역회사 직원, 명문대 재학생 등. 나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스터디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활발하게 영호에 대해서 공부하고 고민했던 때가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강의가 끝난 뒤 강의실에서 습작을 분석하고 커피숍에서 우리의 일을 계획하고 서로 조언도 해주고... 캡틴은 청주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J형이었는데 이미 30줄에 접어든 유부남이었다. 아주 치밀하면서도 고집이 센 그리고 정말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다. 한 번은 술을 밤늦게까지 먹고 그 형님 집 옥상에 가서 침낭을 덮고 별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우리 스터디 팀은 청평 콘도로 1박 2일의 M.T도 다녀왔다. 그런데 거기서 아주 쇼킹한 일이 있었다. 남자 셋, 여자 셋이 갔는데 밤이 깊어 영화이야기와 술이 좀 들어갔다. 불을 끈 상태에서 캡틴이 옷을 다 벗고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하고 한 가지씩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진실의 시간을 갖은것이다. 결국 무용을 전공한 S군만이 캡틴을 따라 했다. 그런 파격성과 황당함이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같은 꿈을 가져서 마냥 즐거웠고 또 동지들을 만나서 깊은 연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녀가 만나니 질투 아닌 질투도 하고 어긋난 마음도 있었다. 난 충만된 에너지를 느꼈지만 남을 설득하는데 정말 어려움을 느꼈다.

영화세상 2주년 기념 대둔산 M.T(1995.7.15~7.16)


내가 쓴 습작 단편 시나리오 '오늘보다 다른 내일'은 호되게 비판과 욕을 먹었지만 6개월 과정의 시간은 일을 하면서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영화도 많이 보았고 스터디를 통해서 인간관계도 넓혔고 심도 깊은 영화이야기도 나누었다. 기초반 수료 후 바로 일주일에 한 번 강의가 있는 전문반 수업에 난 바로 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사정상 흩어져 자신의 일에 열중하였다. 나 역시 전보다는 덜 집중하게 되었다. 그중 무용을 전공했던 나보다 어린 S는 서울예전에 다시 들어갔고 동숭아트센터에서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을 볼 때인 올해 여름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전문반 수업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주입식 강의에 익숙해서인지 한창 도축장 일이 바쁠 때인 겨울 수업이라 종종 강의에도 빠지게 되었다. 남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수료증뿐이었다.


그때 집중해서 시나리오 공모전에 도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은 내 열정이 부족했고 달리 말해서 집중력이 부족했다. 나는 깊은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좀 더 치고 나갔으면... 강남의 극장가도 내가 서울에 올라가면 꼭 다니곤 했는데 3호선 신사역에서 내려서 처음엔 30분 이상을 걸어서 시네하우스에 갔다. 그곳은 영화 전단지나 엽서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지금도 애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거리가 멀다는 약점이 있다. 그곳에서 레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 자료를 얻었을 때의 희열이란! 작은 달력도 한주먹 가져왔다. 그리고 변영주 감독의 여성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뤼미에르 극장에서 보고 큰 울림을 받았다. 강남역에서 내려서 우리나라 최고의 시설이라는 시티극장과 동아극장등이 있는 곳을 거쳐 다시 씨네하우스로 가는 자료 수집 코스를 만들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엄청 많이 걷는다. 걷는 게 좋다. 뛰는 것은 도 좋다. 육상선수의 이야기를 그릴 시나리오도 계획하고 있다. 서울에서도 보통 많이 걷는 게 아니다. 찌는 듯한 더위와 찬 바람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러면서 내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도시 풍경등에 대한 구도를 생각해 본다. 이런 분위기는 이런 장면으로 저 사람은 어떤 앵글로...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 갈 때는 왕복 4시간이 이동시간으로 빠지기 때문에 작전 계획을 수립해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볼 수 있다. 종로 5가의 연강홀에서 '유럽영화페스티벌'이나 '임권택 영화제'를 관람할 때도 이런 치밀한 계획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회지와 함께 회원들에게 배송해 줄 영화전단지를 가방이 찢어져라 무겁게 담아와야 했기 때문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철판을 깔고 극장을 돌며 홍보자료를 들고 나왔다.


나 스스로도 영화에 목은 맨 사람인지 영화자료 수집에 목을 맨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종종 있다. 지금은 무작정 영화자료 수집을 하는 단계는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사회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내지는 타인과 자신과의 교감신경의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친구, 선배들에 대한 배신과 불신이 3학년 때에 생겼다. 나의 독선적인 성격과 타협이 부족한 고집도 있었다. 올해도 나는 휴학을 하였고 집안 사정상 나는 올해 1995년 여름부터 생계와 영화세상 회지를 만들기 위해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첫 직장이었다. 타월을 만드는 신탄진의 작은 공장이다. 면패드, 베개패드, 이불, 침대커버, 목욕 가운 침구류도 만드는 곳의 봉고차 배달기사일이다. 일을 하면서도부터 일요일 밖에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전처럼 서울에도 자주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세상>도 2년이 지나서 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 1995년 6월호 영화매니아 코너에 소개된 필자의 기사


그러다가 시티극장에서 제2회 서울단편영화제를 관람한 지난달에는 정체되어 고개 숙인 나의 영화에 대한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나중에 대상을 받은 김본 감독의 <모범시민>과 해외에서 더 이름 높은 홍윤아 감독의 <지금 Here, Now>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극장을 가득 매운 영화광들의 초롱한 눈매를 정말 신선했다. 먼발치에서 본 젊은 감독들의 모습, 극장 입구에서 대형 포스터 2종류와 영화제 로고가 찍힌 조끼, 전화카드, 라이터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티켓은 따로 판매되는 게 아니라 5천 원짜리 티켓북을 사서 그 안의 티켓을 한 장씩 뜯어내면 1회 상영시간인 1시간 30분 정도에 네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서인지 홍보 책자도 고급스러웠고 감독의 목소리며 영화제 규정 등이 함께 실린 멋진 프로그램이 인상 깊었다. 영화제의 자원봉사는 PC통신의 영화동호회에서 했다.


나는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내 작품으로 관객에게 선을 보일 수 있을까? 참가한 감독들이 외국 유학파가 많았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작품의 수준이 전년에 비해서 높아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우리 관객들의 한국 단편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전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뜻깊은 시간이었다. 극장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난 도시락을 까먹었다. 배고파서 맛은 좋았다.


지난주 화요일, 간 밤에 내린 눈과 차가운 기온으로 얼어버린 도로를 기다시피 해서 두 시간 만에 신탄진 공장으로 출근했다. 밀리는 차속에서 이런 날은 어디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공장에 세워놓고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돌아다녔다. 삐삐도 껐다. 그냥 무작정 헤매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인 혜화역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 광장에 가봤다. 제인 캠피온 영화제 그리고 짐 자무쉬의 독립영화 <천국보다 낯선>이 상영 중이었다. 그곳은 가히 영화광들의 천국이자 사랑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트센터에서는 1회 서울 독립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는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디 갔었어?" "무슨 일 있었냐" "귀신이네, 어디 사라졌다가 온 거야?" 나는 속으로 배시시 웃었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내 마음속 깊은 울림에 순응했다. 그것은 기쁨과 알 수 없는 환희로 다가왔다. 나는 떨지 않는다. '영화'가 있고 "영화세상"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지키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오, 예~!


P.S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 어디든 가야 하고 또 누구든지 만나야 하고 무엇이든 저질러야 한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가 되었어도 나는 개판을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세상, 시네마떼끄 컬트 월간 회지의 합본호를 만들었다. 4권의 표지 제1호(1~12호), 제2호(13~24호), 제3호(25~36호), 제4호(37호~48호)


2024.12월에 발행된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채록
영상자료원 구술 채록하는 동영상 촬영중 스틸, 구술 채록 연구자 소개
필자의 간단한 약력 소개
대전 한밭케이블 TV의 영화보기 코너는 6회 촬영하여 방영되었음(199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