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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석 Nov 15. 2024

月刊 영화세상 제37호~제44호 편집 & 활동(2)

영화세상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

새로운 '씨네 21 플러스 모임'을 만들고 스터디팀 구성


  저는 또 새로운 일을 꾸몄습니다. 여하튼 그때나 지금이나 좌충우돌하면서 무언가 시작하고 일을 꾸미는 것은 정말 잘합니다. 마무리는 제대로 못하면서요. 우선 회원 확보를 위해서였습니다. 변화하는 영화와 우리의 환경에 발맞춰 다양한 회원들을 모으고 중에 같이 또 일을 같이 할 사람이 나오기를 바란 겁니다.  물론 월회비를 받으니 그 점도 무시 못합니다. 당시에도 사비로 매달 스크린, 로드쇼 양대 영화잡지는 물론 1995년에 나온 KINO, 프리미어 잡지를 매달 꼭 사서 보고 사무실 책장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나온 영화주간지 씨네 21도 정기구독을 해서 보고 있었는데 거기 독자 게시판에 '영화 스터디 모임'을 한다고 짧은 광고를 하게 됩니다. 이름하여 '씨네 21 플러스' 모임. 기존 회원들보다는 대전 지역에 있는 분들 위주로 스터디를 할 요량이었습니다. 이곳을 통해 먼저 씨네 21 모임을 만든 제주의 '영화만세'라는 모임을 참고했습니다. 그리고 제주로 제가 직접 교류와 휴가 겸 찾아가고 시네마떼크 연합의 일원이 되자고 권유도 하고 끌어들이게 됩니다. 여하튼 '씨네 21 플러스'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고 우리의 소식지를 알려드리고 회원으로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말에 세계 영화사팀, 시나리오팀으로 나누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식지에 그 결과와 내용도 정리해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게 사실은 좀 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모임을 어느 정도 제가 참여하여 틀을 세우고 자체적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저는 뒤에서 지원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영관이 있는 사무실을 다시 들어가고 홍보와 프로그램도 만들고 자료 테이프도 준비해야 되고 일이 많아지니 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도 시나리오팀에 들어갔는데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였고 천천히 내부에서 불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방의 연합 회의에 나가고 제가 만들었지만 공공재 성격인 시네마떼끄를 제가 사유화한다는 불만이 일어났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을 안 당시 회비를 관리하던 총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영화세상 시네마테크 컬트'를 나가 독립을 하게 됩니다. 새로 구한 사무실로 이사를 오고 나서 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도 속이 좁아서 저의 방향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회원의 의견을 듣고 일을 하는 사람에게 역할 분담을 시키고 계속 꾸려나갔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지금도 계속 운영이 되는 건강한 시민 영화 영상 단체의 뿌리가 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저의 고집과 아집이 많은 불편을 가지고 오고 우리 팀에서 나간 사람들이 모여서 '1895'란 팀을 만들었습니다. 따로 사무실을 구하고 독자적으로 영화제를 개최했습니다. 대전에 두 개의 시네마테크가 활동을 한 것입니다.


뒤에 스크린이 메달린 사무실 겸  상영공간
선화동 지하를 나오기전에 주최한 떼끄 연합 회의
광주 오성환, 대전 민병훈, 광주 박상백 대표, 대전 김재경, 대구 한받(이상 윗줄), 전주 장영목 대표, 부산 김성남 대표, 서울 곽용수 국장, 대전 황규석 대표, 대구 서영지
회의 후 뒷풀이
김성남 부산 시네마테크 1/24 대표? 현 대전 아트시네마 대표 강민구, 현 대전 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민병훈(대전역)
전국 시네마테크연합 모임 결성 준비 회의 - 연대의 시작!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서울의 문화학교 서울의 곽용수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시네마떼끄들의 연대를 모색한다고 해서 또 당연히 참석한다고 했습니다. 전국적인 연대가 지역이 시네마떼끄 활동의 중용성과 당위성이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전주등 타 지역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됩니다. 저희 대전은 정책 분과를 맡아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제가 중고 습합차가 있었는데 서울, 광주, 전주, 대구 등 지방으로 시네마테크 친구들을 많이 태우는 기사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회의의 내용을 정리해서 소식지에 꾸준히 실었습니다. 1997년 2월 2일 일요일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에서 모여 전국 시네마테크 연합 발족 준비회의 진행했습니다. 문화학교를 서울, 대구 제7예술,  전주 온고을 영화터, 부산  1/24, 광주 영화로 세상 보기, 대전 컬트 모두 10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날이 전국의 시네마테크 운영 관련자들이 처음으로 모여 교보빌딩 옆 작은 감상실이 있는 컬트 사무실을 방문한 뜻깊은 날이 되었습니다. 평택, 청주, 전주, 광주에 이어서 우리 대전에서 회의를 가지고 각 분과를 나누고 역할을 맡게 되는데 우리 대전 컬트는 정책분과를 맡기로 했습니다. 회지에는 당시 시네마테크의 가치를 설명하고 전망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계속 실었습니다. 그리고 상영 프로그램도 자료가 가장 많은 문화학교 서울뿐만 아니라 지역끼리 자막을 입힌 VHS 테이프를 카피해서 교환하여 프로그램으로 쓰고 보관하고 대여도 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보다 원활해진 자료의 수급이 된 것입니다.  

시네마테크연합 준비회의 모습


이듬해 그러니까 1997년 5월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있었던 '전국시네마테크 연합'의 발족식까지 꾸준히 회원들과 참석하고 교류를 하게 됩니다.  지역을 돌아다니며 회의를 하고 각 지역의 시네마테크 즉 엄밀히 말하자면 비디오를 상영하는 수준의 작은 단체지만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더 친근해지고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네마떼끄연합의 발대식까지의 일정과 내용은 누구보다 잘 아니 따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의 1996년 6월부터 12월의 상영 프로그램


  1996년 12월에는 대전의 서일고와 모교인 대신고를 방문하여 <파리대왕>, <이웃의 토토로>, <빨간 돼지>를 수능시험을 본 고3학생들에게 틀어주었습니다.  6월 대전 컬트의 창립 영화제인 "우리들이 숭배하는 컬트'를 시작으로 7월 ' 가까운 나라, 먼 영화', 8월 '컬트는 지금, 호러 영화 파티 중'을 진행했고 9월은 준비된 '컬투와 떠나는 영화여행' 프로그램이 상영이 되었습니다. 10월부터 우리 영화세상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0월 '수다쟁이 우디아 순딩이 명세 사이를 멋대로 오가는 고다르'라는 프로그램을 상영했습니다. 우디 알렌과 이명세 그리고 장 뤽 고다르 이 세분의 감독의 영화들입니다. 11월에는 두 가지 주제였는데 '노커트 영화주간'과 '애니메이션 영화주간'을 상영실에서 진행했습니다. 자주 오는 회원 민병훈과 최준, 이정학 친구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12월에는 일반인들은 조금은 생경한 '퀴어 시네마'라는 주제를 만들어 상영을 합니다. 이제 사무실 공간이 생기고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지역의 문화정보나 대학가에도 조금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제가 팩스로 프로그램을 보내고 또 알음알음 우리 영화세상 시네마테크 컬트의 취재를 나왔습니다. 12월에는 '거꾸로 읽는 80년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80년대 새롭게 세계 영화사에 등장한 화제작 문제작들을 추려서 상영을 한 것이었습니다. 영화광이었던 민병훈 컬트의 운영의 위원으로 만들어졌던 프로그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갈마동을 나오고 선화동 상영관도 4개월 만에 나오게 되다

1997년 2월 대흥빌딩 501호 새 사무실에 막 입주하고 나서..


  제41호(1997.03)부터 대흥동 472번지 대흥빌딩 501호를 주소로 우리 컬트가 운영을 하게 됩니다. 회지에는 대전 컬트와 비슷한 성격의 각 지역의 시네마테크가 활동과 회원들 소개글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2월에 회의를 가진 전국의 단체의 대표자들의 회의 후 기념사진도 실어놓았습니다. 영국에서 영화 공부와 영상일을 하는 이덕성 회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 영국의 자료도 보내주고 한국에 오면 찾아오는 열혈 회원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반대로 한국의 회원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어학연수를 가는 경우도 종종 생겼습니다. 독일로 간 고연숙 회원, 캐나다로 간 설경숙 회원. 그리고 또 한국의 대학과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선생님들도 영화를 보러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물어 컬트에 왔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말에 이석호 형님이 오셔서는 제게 이제 대전의 가게를  정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8월 24일 이사를 하고 한참 즐겁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다행히 액정과 스크린 다른 자려 테이프는 계속 보관하고 사용을 하라고 하셨셔 다행이었습니다만 어떻게 공간을 구해야 할지가 정말 문제였습니다. 이제 좀 익숙해지나 싶었는데 여기도 반년도 못 있다가 비워야 한다니 말입니다. 그래도 다 가져가시지 않고 놓고 간단 맘껏 쓰라고 하니 천만다행이라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모은 돈도 또 집에서 가져다 쓸 돈도 없었습니다. 사무실 상영실을 구하는데 제일 큰 문제는 보증금이었습니다. 누가 돈도 안 되는 이런 공간을 자선사업처럼 쉽게 내줄 리도 사람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컬트 집들이 고사상 1997년 3월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삿말~
떡과 막걸리를 나누며 참석자들의 자기소개와 인사
1997년 2월 대흥빌딩 501호, 첫 자체 독립 사무실을 갖다

  꿈을 키워주는 자선사업가, 뜻이 있는 독지가라 단어를 계속 그려보았고 이제 다시 공간을 나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많은 곳을 발품을 팔아서 돌아다녔습니다. 이왕이면 돈을 적게 들이면서 상영공간을 확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전 중부경찰서 뒤 골목에 타일이 붙은 건물을 보고 관리사무소에 가서 물어보았는데 5층으로 절 안내하더라고요. 비어있는 사무실이었습니다. 밖에서는 4층이었는데 5층이 있었습니다. 저는 옥탑사무실이라고 불렀습니다. ㄱ자를 돌려놓은 형태였는데 세면대와 화장실도 안에 있었습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무실 공간을 만들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좀 기다란 공간이 나오는데 스크린이 들어갈 폭이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될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보증금 50만 원에 월 23만 원(관리비 3만 원)에 계약을 맺고 이사를 했습니다. 발품을 판지 두 달 만에 아쉽지만 그래도 교통도 좋고 비용 부담도 없는 공간을 찾아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자체적으로 마련한 첫 독립 사무실이었습니다.  


동서남북을 뜻하는 검은 필름에 세상을 바라보는 밝은 흰 빛이 각각 들어간 로고
1997.4.11~4.13 계룡산
시네마테크연합 계룡산 전체 M.T(대전 시네마테크 컬트 주관)

  1997년 2월 5일 목요일이었습니다. 대흥동 대흥빌딩 501호 새 사무실로 이사를 했습니다. 작지만 상영공간이 따로 있었던 그래서 작은 극장 같았던 지하 극장을 나와 다행히 두 달 만에 5층 사무실로 이사를 완료했습니다. 밖에서는 그런데 우리 사무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길을 잃고 방향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러면  수시로 전화로 설명을 하고 아래에 내려가서 5층으로 모시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저희 사무실밖으로 그러니까 건물 옥상으로 나가면 우리 건물 위에 다시 또 작은 건물이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일본어 통역을 하는 걸음이 좀 불편한 장애를 가진 여자분이 혼자 사시는 오피스텔 같은 곳이었습니다. 어쨌든 스크린도 걸고 암막도 중앙 시장에서 커튼 장사를 하친 국민학교 동창 친구에게 부탁해 저렴하게 맞추어 달았습니다. 암막을 치고 불을 끄니 그래도 작은 소극장 분위기가 났습니다. 3월 8일 입주를 축하하고 발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습니다. 광주와 청주 그리고 부천의 시네마테크 동지들이 축하해 주러 방문을 해주셨습니다.  폐업하는 비디오가게의 비디오장은 서울의 김기수 회원이 내려왔을 때 주워왔습니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서 북카페를 하시는 김기수 회원님도 그때 일을 생각하며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아찔했었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출발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습니다. 설렘과 함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말입니다.


대흥동 대흥빌딩 501호 새 사무실에서 발행한 첫 영화세상
41호(1997년 2월)부터 대흥동에서 발행한 회지

 

 제41호(1997년 2월)부터 대흥동 주소로 회지를 발행했습니다. 본격적인 시네마떼끄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첫 번째로 '시네마떼끄 연합군 전사들에게' 애정과 응원의 글을 제일 먼저 썼습니다. 제42호(1997년 3월)에서는 시네마테크 컬트와 관객집단 영화세상의 1/4 분기과 활동을 점검하고 대표인 제게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또 나는 기록을 했습니다. 당시 회비를 관리하던 총무와 대구의 시네마테크 회의에 다녀왔는데 선물한 우리의 회지를 본채 만채 하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3명의 열혈 회원들에게 추궁을 당하듯이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걸 기록을 했습니다. 진로와 방향에 대햇 함께 말한 분들의 내용의 진위 및 수정 여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사는 묻지 않고 회지에 기록을 해서 만들어내니 크게 또 원성을 샀습니다. 너무 솔직해도 탈이 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사실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의견을 모아서 나가야 하는데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제41호의 편집의 경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친구이자 회원이 이영이란 친구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친구의 여동생이 그때 작은 학원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복사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늘 회지의 복사와 제본을 하면서 복사를 해서 갖다 주면 제본비만 내면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밤 11시 정도에 가서 새벽까지 회지의 속지를 거의 A4용지로 1000장 정도 밤새워 복사를 하고 새벽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또 몇 달을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잉크 토너가 떨어졌더라고요. 참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외형적인 몸짓 불리기에 열중인 제 모습을 보고 방향을 제대로 잡으라는 의견 제시와 충고였습니다. 여하튼 이사를 하고 바로 컬트가 이때부터 쌓였던 불만이 표출하여 서서히 분열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름 투명하게 관리한다는 회비도 문제로 지적을 받았습니다. 영문도 잘 모르는 지방의 편지를 통해 소박하게 교류한 순수한 친구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지방의 순수한 영화세상 회원들은 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여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대흥동에서도 사무실에서 이전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방석을 준비해 대내 영화제를 준비했습니다.


사무실이 없던 시절의 만남은 주로 지하 상가
1996.12 ~ 1997.3월 정기 상영 프로그램


 전국시네마떼크연합 M.T를 주관, 현실에서 컬트의 목소리를 드높이다

   

43호(1997년 4월)에는 '80년대 프랑스영화 회고전'과 '임권택 영화 전 두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영화의 상영과 소식지의 발행이 제일 큰 임무이자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겐 중단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컬트가 소장한 도서 목록과 영화 월간지, 주간지 목록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대전 컬트가 준비한 전국시네마테크 연합 M.T를 계룡산 국립공원에서 진행했습니다. 제가 또 소식적 놀던 가락이 있어서 오락부장을 자쳐했습니다. 30명이 넘는 전국 각지의 시네마테크 연합 운영진들이 모여 즐거운 친교의 시간과 더불어 활동의 의지를 다지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44호(1997년 5월)에서는  전국시네마테크 연합의 시선으로 영화진흥법과 음반과 비디오에 관한 법률을 이야기했습니다.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표현의 자유라는 대원칙이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어야만 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내용이고 우리가 함께 힘 모아 대처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헌법재판소의 심의 위헌 판결에도 영화진흥법 개정안이 원래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하는 독소종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대책위에 참여한 활동가인 최진아 씨를 저는 서울 문화학교 서울에 찾아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우리 회지에 정리해 올렸습니다. 그리고 열성 운영위원인 최준 씨는 서울 영상집단(서영집)에 찾아가 첫 제작단체 인터뷰를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그때 좀 열심히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가열하게 행동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44호에는 안타깝게 화재로 작고 하신 김기영 감독님의 문제적 컬트 영화를 상영하는 '김기영 영화제'와 '컬트 영화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컬트 1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자료 전시회를 사무실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천정과 벽에 코팅된 영화포스터 전단지들로 도배를 하듯이 가득 채웠습니다. 물론 회원들의 영화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실었습니다. 여전히 씨네필 김기수 씨의 영화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새 친구를 소개하는 코너는 늘 새로웠고 신선한 기운이 풍겼습니다. 영화를 보고 또다시 새로운 글로 표현해 재조명하는 글도 실렸습니다. 그리고 컬트 스케치라고 해서 방문객과 컬트가 하는 일도 일기처럼 37호(96년 7월)부터 기록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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