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세상은 2주년을 지나 3년 차인 1995년 하반기부터 1996년까지 큰 변화가 불어닦칩니다. 1995년 12월 영화전문점 '칸느'의 도움을 받아 지하지만 첫 사무실을 얻은 건 도약의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비디오테이프와 자료들을 구비해 놓고 필름 Exit란 이름으로 수요일 밤마다 20인치 모니터로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감상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프로그램에 또 영화세상에 시네마떼끄란 이름을 넣기 시작했네요. 지방의 회원들에게는 집중을 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대전의 정보지나 방송을 통해 직접 활동을 할 수 있는 회원을 계속 늘려갔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회원 중의 한 명이 작은 극장을 인수했습니다. 국일극장이란 지하 단관 극장인데 특이한 게 위층은 한옥으로 된 요정 같은 고급 술집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국일관이라는 술집은 참 신기하게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신문 배달을 하면서 그곳에도 신문을 배달하던 곳이었답니다. 여담입니다만 늘 그곳에 가면 한복을 곱게 입은 여성분이 계셨아요. 잠을 못 잤는지 피곤한 모습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신문 대금 수금을 나가면 빳빳한 현금으로 잘 주셨어요. 가끔 거스름돈을 가지라고 하기도 했어요. 1981년 추석인가 그때 그 마담 누나가 제게 갈색 찰고무로 높은 굽의 멋진 신발을 선물로 주기고 하셨어요. 여하튼 그 건물의 지하에 재개봉관이 있는 것은 알았는데 그 극장을 인수하여 씨네아트홀을 재개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개관프로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상영했습니다. 극장 안에는 작은 응접실도 있었는데 각종 영화자료도 놓고 우리 영화세상 소식지도 비치하고 시네필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커다란 소니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화가 있어 좋은 아침이라고 매주 일요일 아침에 쉽게 볼 수 없는 테이프로 영화를 한동안 영화를 틀었습니다. 영화세상의 외부 상영프로그램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에 관한 정보를 친구인 최정호 친구가 멋지게 편집해 카탈로그처럼 만들어 읽어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읽는다'는 느낌이 들도록. 그런데 둘 다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갈마동 사무실은 나와야 했고 또 시네아트홀의 일요일 아침 9시 프로그램도 극장도 눈치가 보이고흐지부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70만원 월급으로 생활하며 컬트를 이끌다
월간 영화세상 복사 제본비 영수증
회지 발행 생각하다 난 오토바이 충돌 사고
짐을 빼고 나와도 우리 영화세상 소식지는 계속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건 뭐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였지요. 전 작은 타월과 이불의 봉제공장 배송일을 했습니다. 생활비를 벌려고 그랬죠. 공사장 일은 돈이 모이지 않더라고요. 한 번은 회지 만들 생각을 하며 신탄진에서 승합차를 몰고 가다 오토바이 한 대가 작은 교차로에서 제가 운전하는 차의 옆을 '쾅'하고 충돌하고 나가떨어졌습니다. 속도는 줄인 것 같은데 주위를 잘 살피지 못했네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오토바이 운전자. 저는 정말 넋이 나가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보험처리를 하는데 보험금도 좀 연체가 된 상황이더라고요. 사고 나고 사장님께서 주셔서 겨우 보험금 내고 처리를 했습니다. 얼굴을 40 바늘을 꿰매었습니다. 거듭 사과를 하고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젊은 청년인데 다행히 저를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도 과속을 했으니까요. 정말 호인을 만났습니다. 지금 건강히 어디선가 잘 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거듭 죄송한 마음입니다. 정말 그때 놀란 생각을 하면... 금전 출납부를 보니 당시 제 월급이 70만 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일하면서 저녁에 회지 만들고 일요일에는 회원들 만나고 좋았습니다. 밤을 새워 영화세상 준비하고 낮에는 힘들게 지방을 다니고 공단에서 무거운 원단을 나르고 백화점 배송 일했습니다. 돌아보면 어떻게 그런 체력이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하루하루 영화를 사랑하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시민을 위한 열린 영화제'에 몰린 관객들
창간 2주년 기념 대전의 영상문화실태(극장을 중심으로) 결과 보고서
제37호 회지에는 스크린쿼터(한국영화의무상 영제)에 대한 중요성을 발췌해서 서두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음비법 개정문제가 또 영화계의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나름대로 전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 그런 공청회도 다니고 행사도 다니며 주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위헌 소송을 냈고 헌법재판소에서 심의를 통한 규제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표지에도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의 판결문을 실었습니다. 영화의 창작자에게 정말이지 표현의 자유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싶습니다. 1995년 9월 영화세상 창간 2주년을 맞아 대전의 영화문화 전반에 걸친 젊은 관객들의 생각과 의견을 모으는 설문조사를 학 제24호에 그 질문과 결과를 올리게 됩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모임으로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내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회원들이 큰 서점을 나누어 돌며 고생을 했습니다. 같이 힘을 모아 636명의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그 정리는 제가 했는데 일일이 설문지를 보고 체크하고 숫자를 세고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의 세밀한 분석을 1년 전에는 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을 구하고 다시 평가와 분석을 하는 "대전의 영상문화 실태(극장을 중심으로)" 란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를 만들어 게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밀린 숙제를 마친 시원한 기분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대전의 극장을 이용하는 젊은 관객들을 대상을 설문조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1회 부산 영화제의 개막은 시네필의 욕구를 팽창시키다
극장 이용 횟수는 한 달에 1~2편을 본다는 의견이 53.5%(335명이)로 제일 많았는데 주로 여성관객들이었습니다. 영화를 가장 좋은 여가 및 문화의 향유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대전의 극장들은 많이 낙후가 되어서 48%(308명)이 커다란 대형극장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51%(320명)를 제외한 46%(191명)의 관객은 영화를 주로 비디오로 본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시 비디오 가게도 정말 성업이었고 동내마다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극장에 바라는 점은 좋은 서비를 요구한 관객이 21%(134명)이었고 17%(109명)은 좋은 영화를 선택해서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3%는 시네마떼크의 형태의 극장을 원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마침 1996년은 9월은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가 시작한 해입니다. 저도 내려가보고 그 열기를 느꼈습니다. 특히 감독과의 대화의 시간이 많아서 더 흥미롭고 영화를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일본 영화의 개방도 이슈가 되었고 홍콩 반환의 문제, 그리고 다가오는 밀레니엄 새 천년에 대한 세기말의 불안과 기대가 정말 다양한 영화에 드러났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컬트라는 공간에서 자리 잡은 영화세상은 다시 대전이란 지역의 영화문화를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1년 전의 설문조사지만 다시 분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조사보고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가 주중에 지역의 라디오 프로에 매주 참석해 영화계 화제를 전할 때도 소개하곤 했습니다.
컬트 극장 스크린 앞에서 영화세상 회원들
상영관이 있는 대전 영화공방 컬트
공간을 같이 쓰게 해 준 영화전문점 '칸느'의 영업이 힘들어져 철수할 때 할 수 없이 같이 공간을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1995년 12월 들어간 사무실을 1996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갈마동 지하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좀 많이 의기소침했습니다. 사무실 얻을 돈도 없는데 이제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기 상영회도 하는 등 막 타오르기 시작한 영상문화운동의 불씨가 꺼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어디 새로운 곳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두리번두리번하니까 또 그런 곳도 생겼다가 사라졌습니다. 젊은이들이 자주 많이 들러 활력이 넘치는 은행동 성심당이 가까운 골목에 큰 스크린으로 무료로 영화를 보여주는 곳이 있다고 들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D.D 클럽'이란 곳인데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고 관람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회비 35,000원을 내면 방문해서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볼 수 있고 또 소장한 수 천장의 비디오를 무제한으로 빌려준다는 곳이었습니다. 극장보다는 저렴하고 여러 명이 이용하는 단체 비디오방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스크린이 크니까 극장 같은 몰입도가 생기더라고요. 아 이렇게도 영화로 사업을 벌일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어쨌든 저런 상영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6년 6월에 '대전 영화공방 컬트'라는 곳이 생겼는데 대전 선화동 교보빌딩 옆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회지 편집자인 최정호 친구와 가보니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었습니다. 한쪽은 맥주를 파는 호프집이었고요. 커다란 스크린이 있는 상영공간에 디렉터스 체어 20개 내외의 관람의자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작은 영화관으로 집중하며 관람하기 정말 편안했습니다. 한편에 3천 원을 받고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상영실 뒤에 작은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대전에 처음 생긴 색다른 공간이라 취재를 많이 옴
왼쪽 위 이영 회원, 영국에서 온 이덕성 회원
컬트의 운영을 맡고 거의 살다시피함
갑자기 대전 컬트의 운영주체가 되다
사장님과 인사를 드리고 우리 영화세상 회지를 드렸습니다. 그곳을 만든 이석호 사장님께 우리가 회원들 모임이 있는데 여기서 모임을 하면 안 되겠냐 여쭙고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본업이 인테리어 사업을 하셨던 이석호 사장님이 갑자기 동생이 크게 다쳐서 천안 고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사정으로 그곳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고 제게 연락을 했습니다. 옆의 호프집 운영은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지하의 반쪽인 영화공방 컬트는 네가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고요. 프로젝터며 스크린 등 시설을 그대로 이용하고 월세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길래 흔쾌히 제가 해보겠습니다 했죠. 그전에는 3개월 정도 '열린 빛 영화모임'이라는 대전의 씨네필 서클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컬트'라는 이름을 그대로 끝까지 사용하였습니다. 그 컬트에 저의 '영화세상'의 들어가서 운영의 주체가 된 것이다. 사무실도 얻고 또 정기적인 상영공간을 운이 좋게 얻게 된 것입니다.
96.12.29. 일요일 대천 해수욕장 겨울바다 나들이 외국회원 3명 등 9인을 당시 저의 중고 베스타 승합차에 태우고 ..
그렇게 1996년 8월 24일 토요일 이사하고 8월 25일 일요일 첫 출근을 했습니다. 갈마동의 첫 번째 사무실을 나와서 얼마 있다가 더 좋은 환경을 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제안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세상"이란 모임이 "대전영화공방 컬트"의 운영의 주체가 된 것입니다. 이후 저는 대흥동 사무실을 구해 다시 이사를 간 1997년 3월부터 "대전 시네마떼끄 컬트"로 이름을 바꾸어서 시네마떼끄 활동을 더 명확하게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 6월 회지의 이름도 "영화세상"에서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로 통합하여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결정을 기존의 영화세상 회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기적인 프로그램 상영을 중시하는 시네마테크의 활동을 집중하다 보니 기존에 가입한 지방의 회원들의 섭섭함도 지금은 십분 이해가 갑니다. 많이 서운해하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