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영화세상"을 만든 지 2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회지를 만드는 일은 이제 좀 익숙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안의 내용을 채우는 일은 역시 고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돌아보면 회지에 좋은 내용만 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임을 이끌고 영화세상을 이끌던 부산의 한 회원 말로 저 황대장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책자를 만들고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완전히 학구적인 면모도 없고 그렇다고 정말 미친 듯이 영화를 섭취하는 완전한 광인의 모습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여 회비를 받고 회지 제작비를 중단 없이 만들어야 했습니다. 역시나 1995년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남동생이 또 군대에 갔습니다. 돈 없고 백이 없는 집안이라 또 저기 7사단 칠성부대 GOP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용역 사무소에 나가 공사장 철거, 현장 보조, 자재 나르기 등의 일을 틈틈이 했습니다. 95년 6월호에 영화 마니아 코너에 나온 인터뷰 사진을 보았습니다. 제가 연락을 해서 우리 "영화세상" 회지를 보내줘서 취재에 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사진도 제가 찍어서 가져갔고 제 정보를 충분히 전달했습니다. 당시 이지훈 기자님과 이야기를 하고 반대로 제가 이지훈 기자님을 인터뷰해서 우리 소식지에 영화잡지사에 다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중단한 학업을 위해 아니 졸업을 위해 학교에 다시 복학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거기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25호의 표지이자 3주년 합본호의 표지 바로 안쪽 내지
1995년 키노, 씨네21, 프리미어 등 영화잡지 창간 붐
1995년 4월 영상작가교육원 전문반의 수료증을 받았는데 기초반처럼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하지 못해서 습작시나리오를 쓰지도 못했습니다. 여하튼 나름의 성과라면 서울을 제 집처럼 이제 왔다 갔다 하고 극장을 많이 알게 되는 정도였습니다.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 영화세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그래도 좋아서 재미가 있어서였습니다. 영화를 특별히 애정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을 연결시켜 주고 또 한 달에 한번 나오는 "영화세상" 소식지를 통해 보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주로 서울에서 근거지인 대전에서 회원들과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995년에는 영화잡지들이 많이 탄생했던 해입니다. 5월에 최초의 영화주간지 '씨네21'이 나왔고 또 월간지 작가주으영화 미학을 탐구하고 인터뷰를 중시하는 월간 'KINO'가 또 창간호를 냈늡니다. 12월에는 할리우드 소식을 전하는 전통있는 미국의 'PREMIER' 한국판이 창간되어 영화잡지의 붐이 일어난 시가였습니다. 어느 날 대전 도청 앞 지하상가를 지나다 영화자료 전문점 '칸느'라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동숭아트센터에서나 보았던 각종 스틸 사진, 영화도서, 팸플릿, 커다란 패널 등 다양한 영화자료를 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정말 대전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영화애호가들을 에게 꿈과 같은 정말 멋지고 예쁜 특이한 숍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물론 다른 회원들에게도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청주에 사는 김진욱 씨와는 미리 안면을 틀고 6월 초 개업식에는 회원들과 방문을 하여서 우리의 작은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회원이 인수하여 오픈한 씨네아트홀 초대권 <중경삼림>
사구 갈마동 지하에 첫 사무실을 얻어 쓰다
25호(1995.10) 이후 그러니까 2년이 지나고 3년 차 되는 시점에 실제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화세상이 좀 더 구체적인 활동이 드러나게 되게 되는 시점입니다. 칸느를 운영하며 글을 쓰는 김진욱 씨를 만나고 또 이전에 최정호라는 동창 친구가 합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정말 평생의 은인으로 또 조언을 해주는 친구로 생각합니다. 최정호 친구는 25호부터 2년이 넘게 우리 영화세상 소식지와 45호부터 대전시네마테크 컬트로 바뀌어 51호까지 나온 우리 소식지를 거의 편집을 해주셨습니다. 힘들 때는 같이 어려워하고 또 조언을 해 주는 든든한 친구로 우리 영화세상 시네마테크 컬트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해준 고마운 친구입니다. 또 한 회원 분이 생각나는데 전재환 이란 회원분은 개인 오피스텔에 작은 16미리 영사기와 외국 필름도 가지고 있었고 카메라도 수집하는 영화광이었죠. 김진욱 씨와 전재환 씨 두 분이 우리와 교류를 하면서 또 새로운 영화세상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또 교류하면서 영화세상은 활동 영역을 넓혀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모임의 장기 비전이나 체계가 없었기에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아쉬운 소리도 많이 듣고 저 개인의 한계도 느끼게 되었지만 분명 영화세상은 온전히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시선이 모인 곳이 아니라 함께 감사하고 영화를 전파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준비하는 시네마테크로서의 방향성을 가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회원들을 근거지인 대전에서 알게 되어 만나는 모임 결성 2주 차인 95년 여름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한국영화의 문제점이랄 이슈가 되는 이야기도 소식지에 발췌해서 실으면서 같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5호에서는 특집으로 꿈 께자 한국영화(배윤희 '오늘예감' 객원기자)에서는 한국영화의 전망을 찾아 나섭니다. 그 첫 단추로 90년에 결성된 '독립영화협의회'의 워크숍과 독립영화발표회를 주목합니다. 이어서 단편영화제작소 필름 인, 시나리오 영상작가 그룹 '작가시대', 시네마떼끄 '문화학교 서울'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록한 영화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감독을 소개하였습니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여성 영화인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내용은 사실 원작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그냥 발췌해서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개관한 시네아트홀의 한쪽 응접실에 모인 회원들
'중경삼림'을 개봉한 시네아트홀 입구 우측 세번째가 전재환씨
회원이 오픈한 시네아트홀 <중경삼림>이 대박나다
그리고 또 큰 사건이 있었는데요. 전재환 회원님이 시내에 지하의 작은 극장이었던 국일극장을 인수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지낸 뒤의 일이라 모두가 내일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안에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도 틈틈이 내일처럼 도와드렸습니다. 극장이름은 시네아트홀로 명명하였고 오픈을 할 때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시사권을 나누어드리는 오픈 행사도 하고 우리 회원들이 함께 하여 손님을 맞이하게도 했습니다. 그때 요금이 3천 원이었던 거로 기억나는데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습니다. 저도 참 양조위의 대사를 다 외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시네아트홀에서 매주 "일요일 영화가 있는 아침"이라는 영화 보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였습니다. 그것도 아침 9시 이른 시간에 말입니다. 1995년 10월 14일 토요일 시네아트홀에서 2주년 모임을 가졌는데 성공적이지 못했고 정확히는 실패했습니다. 아쉽고 불편한 이야기도 저는 가감 없이 우리 영화세상 회원들의 이야기를 회지에 실었습니다. 그전에셀렘이 많았던 여름의 대둔산 엠티도 많이 아쉬웠고요. 회원들의 진솔한 이야기 뼈 때리는 이야기도 가감 없이 싣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도 우리 영화세상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2주년 축하 모임을 반성하고 해부(?)하는 글을 소식지에 썼습니다. 2주년을 맞아 대전의 영상문화의 현황과 극장실태에 대한 현장 설문조사가 명(明)이라면 2주년 모임이 암(暗)이라고 명확히 진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25호부터 영화세상 편집을 도맡은 최정호 친구의 작품
칸느를 열었던 김진욱 님이 칸느에서 판매하는 대형 전지 사이즈 패널을 직접 제작하기 위해 갈마동에 공간을 구했는데 그 지하 공간의 한쪽을 우리 영화세상이 사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95년 12월 대전 변두리 서구 갈마동 3층짜리 상가 건물 지하에 그렇게 바라던 첫 사무실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 공간에서 첫 비디오로 20인치 비디오로 정기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 상영회의 제목은 필름 엑시트(EXIT) 매주 수요일 저녁 사무실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함께 감상을 했고 교차로 무가지에 광고를 해서 찾아오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공동 감상회라 함은 불을 끄고 모니터에 집중하는 시간이죠. 월세를 안 내고 사무실이 생겨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옆 공간에서는 낮에 대형 영화포스터 패널을 만드는데 조금 도움을 주고 배달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당시 인기였던 포스터는 뤽베송의 그랑블루, 퍼시 애들론의 바그다드 카페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1995년 6월 29일 국가적인 대참사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 시기였죠. 저는 생활을 위해 7월에 신탄진의 타월 작은 봉제 공장의 배송운전기사로 취업을 했습니다. 메일 신탄진으로 출근하여 승합차로 타월 원단을 공장에서 가져오고 백화점이나 시장의 매장으로 배달도 하고 미싱 아주머니들의 출퇴근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회지 편집과 모임은 절대로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아침 9시에는 회원의 극장 시네아트홀에서 , 수요일엔 저냑 7시엔 사무실에서 상영프로그램 공지
서울의 영화세상 회원들도 모임을 따로 가지다
1995년 11월 중순 서울 명동성당에서 서울 회원들의 첫 모임이 있었습니다. 김기수, 조재형, 김용우, 장은경 님이 참석하였고 대전에서는 저와 회지 디자인 편집을 하는 최정호 친구가 올라갔습니다. 당시의 화두는 일본문화의 개방문제였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회원들의 생각을 담아낸 회지는 28호 그러니까 1996년 1월입니다. 드디어 우리 집 주소가 아닌 갈마동 사무실이 주소로 나오네요. 96년 1월 24일 현재 78명의 회원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장, 총무, 홍보부, 자료부, 편집부의 시스템을 엉성하게나마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2회의 정기 감상회도 개최했습니다. 29호(1996.2) 소식지는 왕가위 열풍에 대한 회원들의 의견을 담아보았습니다. 정말 많은 회원들이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시를 쓴 친구도 있었고요. 사무실이 생기고 이제 전문적인 편집이 있으니 회지가 좀 더 무개가 있고 다채로워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소와 트뤼포를 소개하면서 작가주의 영화를 인식하게도 하면서 한 줄 영화평론 코너를 만들어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회원들도 참여할 수 있는 페이지도 만들었네요. 그리고 다음 호에 대한 원고 모집을 위해 미리 공지하고 알리기도 했습니다. 30호(1996.3)에서는 미리 당시에 나오는 다양한 영화잡지에 대한 생각을 구하고 또한 동성애에 대한 영화도 주목을 해보았습니다. 이어 31호(1996.4)에 '영화잡지 적인가, 동지인가' 란 특집을 발행하였습니다. 당시의 영화잡지들스크린, 로드쇼, 키노, 씨네 21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이젠 아련한 이름들이네요. 시네아트홀에서의 영화가 있어 좋은 아침이 중단되고 사무실에서 수요일에 이어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 영화감상회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네마테크란 말을 일정표 위에 쓰기도 했습니다.
극장에서 일요일 아침 상영이 어려워지자 주중 사무실 상영으로..
32호(1996.5)는 제가 다녀온 서울국제독립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맨 처음에 다루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서울로 제일 많이 뛰어다녔으니까 그런 정보들을 공유하고 싶어서 영화제나 행사에 많이 쫓아다녔습니다. 물론 극장가도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3호선 신사역에서 내려 30분 이상 걸어갔던 시네하우스는 영화전단지가 많아서 많이 챙길 수 있어 참 좋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우리 임권택 감독님을 소개한 KAIST 영화동아리 예술로서의 영화(예영) 회원인 박정환 님의 글도 발견했습니다. 포항에 살고 있는 여고생 김혜민 친구는 아마 제일 많이 원고를 보낸 친구일 것입니다. 지금 3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친구는 영화를 보고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우리 회지에 보냈습니다. 그것은 시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고 자신의 삶과 비교하기도 하였고요. 정말 궁금한 친구입니다. 이젠 누군가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중년의 삶을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33호(1996.5)에서는 영어 원문으로 헤드 광고 카피 글을 실었는데 지금 봐도 흥미롭네요. 그리고 '사랑의례준칙'이라는 저의 단편 시나리오까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게재했습니다. 34호(1996.7)는 다시 주소가 대전 중구 용두동 낡은 우리 집으로 나오는 것 보니까 갈마동 사무실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영화용품 전문점 칸느의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 얻어 쓰는 저희도 부담스러웠답니다. 사무실을 빼면서 저희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사무실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6개월의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네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2주년 기념 대전영상문화에 대한 설문조사와 함께 시네아트홀의 개관으로 지역의 언론이나 방소도 타게 되고 꾸준히 대전지역의 회원이 늘었습니다. 반면에 지방회원들에게는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죄송한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회원수만큼이나 그 관리가 중요한데 그 부분은 잘 못해서 제가 돌아봐도 아쉽고 부족했습니다. 36호의 마지막 페이지에 눈에 띄는 성명서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영상 관련 악법 폐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의 성명서입니다. 1996년 9월 배포되었네요.
1.허울좋은 심의제도 알고보니 검열제도 표현자유 보장하라
2.독립영화인의 창작자유 억압하는 등록 심의조항 즉각 철폐하라
3.표현의 자유 보장하는 문화정책 수립하라
직접 만들어 들고 다니며 나눈 명함 2종 주소는 우리집
선화동 작은 상영공간을 갖춘 대전 영화공방 컬트로 두 번째 이사
1996년 8월 24일 토요일에 관객집단 "영화세상"은 대전 중구 선화동 교보빌딩 옆 지하 건물로 저는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곳을 관리하고 운영을 하게 됩니다. 천안 영화공방을 여신 전진하 님을 알고 계시던 이석호 형님이 오픈한 곳입니다. 한쪽은 호프집 한쪽은 의자 20여 개를 둔 비디오 상영실을 운영을 하던 컬트를 방문하여 감상실에 서 영화를 본 전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펼쳐지는 희귀한 영화들. 완전히 작은 꿈 꾸던 예술영화 소극장이었으니까요. 당시에 저는 매주 1회씩 대전 KBS라디오 정보프로그램에 나가서 영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석호 사장님께서 얼마 후 동생이 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고향 천안에 올라가셔야 해서 호프집은 세를 주고 감상실은 저에게 운영을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조금 망설였지만 월세를 내지도 않고 1회 상영료 3000원도 운영비로 써도 된다고 해서 컬트를 직장처럼 여기고 매일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건 또 다른 도전이자 출발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36번째(1996.10) 회지부터는 발행 주소를 대전 중구 선화1동 382-49 지하로 적어두고 발행을 하게 됩니다. 또 당시 전 씨네 21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주간지 씨네 21의 게시판에 회원모집 광고를 내게 됩니다. 그렇게 선화동을 통해서 가입한 사람들이 영화세상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영화세상은 2년 차가 지나서 겨울에 갈마동 사무실에서 들어갔고 반년만에 나와 다시 가을에 갈마동 상영공간이 있는 대전 영화공방 컬트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다녀온 두 회원의 이야기가 36호 회지에 실리게 됩니다. 과연 3주년을 맞은 시네마테크 컬트에서의 우리 영화세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음 글에서 . 컬트로의 이사와 새로운 모임에 대하여 다시 또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컬트에 가서 새로 만든 명함의 앞,뒤
지하 컬트로 집에 있던 인켈 오디오 컴퍼넌트를 음향 향상을 위해 가져다 놓았습니다. 시간은 잘 못 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