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밀림에 반하다(모슬포~무릉 곶자왈 17.8km)
<걷기에 대한 단상>
제주에 내려온 지 벌써 12일째입니다. 슬슬 지칠 법도 한데 자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입니다. 체질적으로 방랑벽이나 역마살이 있거나 제주가 펜이 체질에 맞나 봅니다. 아님 걷는 게 맞던지요. 집을 나와 숙소에 연박하니 다람쥐 쳇바퀴입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간단한 조식을 먹고 걷습니다. 걷다 배고프면 식당 찾아 점심 먹습니다. 또 걷습니다. 종점 찾아 스탬프 찍는 미션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옵니다. 사우나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적당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블로그 작성하고 꿈나라 여행입니다. 자고 나면 또 출발, 이게 다람쥐 쳇바퀴이지요.
물론 일상을 벗어나 나만의 쉼을 갖고 힐링을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걷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육체의 한계를 느낄 때입니다. 그럴 때는 걷는 것을 잠깐 쉬는 것도 좋습니다. 다행히 이번 주 월요일 비가 와서 하루를 쉬었습니다. 쉬고 나니 훨씬 부드럽게 내딛습니다.
모슬포 레몬트리 게스트하우스에서 비빔밥을 든든하게 먹고 아침 8:20분에 출발합니다. 커다란 검은 개가 잘 다녀오란 듯이 꼬리를 흔들어줍니다. 대부분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개나 고양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화순 금모래해변의 덕후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개가 아닌 카레라는 이름의 냥이가 있었습니다.
모슬포항이 있는 대정읍내를 빠져나와 모슬봉을 오릅니다. 봉오리 중앙에 인공 구조물이 있는 게 눈이 거스릅니다. 산 중턱에 오르자 군사 보호시설이니 우회하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 구조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모슬봉 정상은 군부대 때문에 올라가지 못하고 중턱을 휘감습니다. 숲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모슬봉에서 산방산(395m)은 코앞에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니 한라산 남쪽 어디에서나 보입니다. 산방산 아래 작은 두 봉오리는 왼쪽에 단산(158m), 오른쪽이 금산(63m)입니다. 처음에는 어제 오른 섯알오름이었나 했는데 지도 앱을 보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모슬봉은 묘지 산 같아 보입니다. 개인 묘뿐만 아니라 공동묘지가 꽤 많습니다.
오르다 보니 모슬봉의 중간 스탬프가 나타납니다. 5km 조금 지난 지점입니다. 모슬포 평야 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은 오름으로 모슬개(모슬포)에 있다고 하여 모슬봉이라고 합니다. 모슬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어 '모살'에서 나온 말로 조선 시대 봉수대가 있습니다.
숲길은 자칫 길을 잃기 쉬우므로 리본을 잘 따라가야 합니다. 모슬봉을 오르내리면서 보는 야생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제주도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입니다. 대정읍도 농사를 많이 짓나 봅니다. 농토 면적이 꽤 돼 보입니다. 제주도 마늘은 전국의 10%, 대정 마늘은 제주의 6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벌써 보리가 익어갑니다. 익어 간다는 것은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가 보여서 정난주 마리아의 묘인 줄 알았습니다. 천주교 모슬포 성당 교회 묘지입니다. 성당 묘지에서 1km 더 가니 정난주 마리아 묘지가 나타납니다. 때마침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를 온 모양입니다. 관계자분이 정약용의 조카며느리 정난주에 대해 자세히 소개합니다. 그녀가 왜 제주까지 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비로 유배 오면서 두 살배기 아들 정경한을 추자도에 떼놓은 일 등 제주올레 기행문이나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을 설명해주길래 한참을 엿들었습니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 숙부인 정난주는 정약현 딸입니다. 정난주의 모친은 최초 천주교 신자 이벽의 누이입니다. 남편은 백서를 써서 순교한 황사영이고(신유사옥),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유배를 갑니다. 정난주는 제주도로 관비로 보내는 과정에 배를 타고 가다 아들 정경한을 추자도에 내려줍니다.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어부 오 씨가 거둬들입니다. 정경한의 7대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정난주에 대한 얘기는 제 블로그에 리뷰한 김훈의 '흑산'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http://naver.me/GrxXUVFY)
화산지대 제주는 같은 화산이라도 지역마다 흙의 색이 다릅니다. 같은 대정읍인데도 서로 다릅니다. 올레책 11코스를 보며 내심 걱정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점심 해결 문제입니다. 책에는 신평사거리 편의점을 지나면 식당이 없다는 겁니다. 막상 올레길 할망가게(편의점)에 도착해서 물어보니 빵 종류밖에 없다는 황당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노파심에 주변 식당을 물어봅니다. 조그만 가면 식당이 있다는 얘기에 환호성을 지를뻔했습니다.
개업한 지 3년 된 신평올레 식당입니다. 손님도 많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올레꾼이나 올레사무국 관계자분이 보시면 참고했으면 합니다. 신평올레(064-792-2111,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371-4)의 메뉴는 떡갈비 정식, 순대국밥, 돔베 정식, 고기 국수, 김치찌개 등이 있습니다. 펜이는 순대국밥 6천 냥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또 출발합니다.
점심을 먹고 조금 가니 무릉 곶자왈로 접어듭니다.
걸으면서 꽃 하나 보고 숲으로 뒤덮인 하늘을 봅니다. 또 고개 돌려 이름 모를 나무를 보고 또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자연이 나인지 내가 자연이지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제주의 허파, 곶자왈에 빠지다>
책에서만 보던 곶자왈을 오늘 처음 걸어보았습니다. 제주의 밀림입니다. '곶'은 숲, '자왈'은 나무나 덩굴이 엉클어진 곳이라는 뜻입니다. 아마존 밀림이 지구의 허파라면 곶자왈은 제주의 허파입니다. 곶자왈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자연유산입니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오로지 올레 리본만 의지해 나아갑니다. 나뭇잎 사이로 쪼개지는 햇살은 눈 부실 정도입니다. 이름 모를 새들은 저마다의 목청 자랑에 펜이 귀는 간지럽습니다. 펜이도 덩달아 휘파람 높낮이로 새와 교감하려고 입술에 힘 조절을 해봅니다. 아무리 해도 새는 동문서답입니다. 제가 새소리를 해석하지 못하니 답답함은 새 쪽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지저귀나 봅니다. 깊은 곶자왈에 들어오니 바스락거리는 제 발소리에 제가 놀랍니다. 한두 번 반복한 뒤로는 면역이 됩니다. 여유롭게 숲이 흩날려주는 상큼한 숲 내음을 깊이 들어 마셔봅니다. 숨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청정한 공기는 폐부 깊숙이 들어와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곶자왈이 공기청정기인 셈입니다.
점심을 먹고 조금 가니 무릉 곶자왈로 접어듭니다. 걸으면서 꽃 하나 보고 숲으로 뒤덮인 하늘을 봅니다. 또 고개 돌려 이름 모를 나무를 보고 또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자연이 나인지 내가 자연이지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이렇게 물아일체의 환상에 빠지게 하는 곶자왈이 바로 제주의 밀림입니다.
다음은 올레 터널입니다. 곶자왈은 숲이 우거져 있어 올레 리본을 보고 잘 따라가야 합니다. 한눈팔거나 헛생각하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곶자왈을 오후 3시 넘어 들어가는 것을 올레사무국에서는 막고 있습니다. 숲은 해가 빨리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곶자왈에 군데군데 돌담이 있는 걸 보고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숲인데 누가 일부러 담을 쌓을까? 아니면 옛날에 사람들이 살다 어떤 이유로 떠나가게 됐을까? 한참 길을 걷다 그 의문을 풀어줄 열쇠가 빛바랜 채 서 있습니다. 팻말에 정씨 집안이 살았던 곳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릉 곶자왈은 2008년에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무릉 곶자왈은 용암이 물결치듯 흘러가면서 만든 물결무늬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곶자왈 코스는 때로는 넓은 길도 있습니다.
11코스 막바지에 이르자 하우스단지가 나옵니다. 하우스단지 진입로에 마을 사람들이 올레객의 걸음을 배려하기 위해 콘크리트길 중앙에 잔디를 심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주민이 계셨다면 감사의 인사라도 드렸을 겁니다. 11코스 종점이자 12코스 시작점에 도착했습니다. 올레책에는 11코스가 17.8km 5~6시간 소요된다고 합니다. 실제 걸어보니 19km 5시간 40분 걸렸습니다(8:20분 출발 14:00 도착). 물론 휴식과 점심시간 포함입니다. 만보기 앱은 움직이는 시간만 체크되니 4시간 26분으로 조금 짧습니다.
종점 옆에는 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이 있습니다. 숙박도 가능합니다. 전화 예약도 했더랬습니다. 그러나 마을이 작아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없어 예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제 예약하면서 식당을 체크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체험골 스텝과 어색한 작별 인사를 하고 좌기동 버스 승강장에서 1시간 40분을 기다려 어제 묵은 레몬트리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버스 기다리는 동안 네이버로 숙소 예약과 비용까지 지불합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오늘의 경제활동>
점심 신평올레식당 순대국밥 6,000
무릉보건지소 옆 좌기동~모슬포 하모체육공원 버스비 1,300
대정해수사우나 5,000
안경세상 안경 콧등 받침대 교환 3,000
대일밴드 600
저녁 국수이야기 식당 김치찌개 7,000
모슬포 레몬트리 게스트하우스 20,000
계 4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