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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Jul 17. 2024

세속적 천사의 외침

언어영역3 | 앤드류 부잘스키의 <그녀들을 도와줘>

무엇을 기대하든 배반당할 거다. 허리를 드러낸 짧은 상의에 그보다 짧은 쇼트 팬츠를 입고 스포츠 바에서 일하는 여성들, 이들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하는 포스터와 제목은 (아마도 남성으로 설정된) 적에 맞서 연대의 힘을 발휘하는 여성 영화가 펼쳐질 거라고 기대하게 한다. 이 기대가 배반당할 수밖에 없는 건 이렇다 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적은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 모르나, 이 둘은 결국 같은 말이다. 리사(레지나 홀)가 눈물을 닦는 첫 장면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영화는 그녀의 눈물에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눈물을 닦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왜 우는지를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도 알 수 없다. 물론 이런저런 유추는 가능하다. 그러나 울 일은 도처에 널렸다. 슬픔은 내 전문’이라는 리사의 대사로 유추해 본다면 리사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훔쳐 대신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편이 모든 직원의 상황에 참견하는 매니저 리사의 캐릭터와도 어울린다. 리사의 슬픔은 그녀가 겪은 사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홈시어터 체험 장면에서 나온 ‘어떻게 느껴지나요?’라는 물음은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말일 수 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을 서사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서사에서 벗어난 실험극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모든 행위가 서사의 수단은 아니지만, 분명 서사는 작동한다. 인물의 행위 그 자체와 서사의 흐름을 번갈아 보면서 그 간극을 맞추어야 한다. 영화의 중심 공간인 더블웨미에 몇 가지 수칙이 있듯, <그녀들을 도와줘>에도 어떤 규칙이 있다. ‘이중고’ 정도로 번역되는 ‘더블웨미’라는 이름이 일종의 힌트다. 모든 일은 두 번 반복된다. 그와 함께 어떤 일은 두 가지 이상의 측면을 지닌다.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메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가 리사를 포옹하는 장면은 리사가 바에 도착할 때와 떠날 때 두 번 반복된다. 그러나 둘의 의미는 같지 않다. 첫 번째 포옹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포옹이었다면, 두 번째 포옹은 떠나는 리사를 위한 포옹이다. 리사에게 꼬인 하루의 시작을 예감케 한 포옹은 리사의 하루를 위로하는 포옹이 된다. 면접을 보는 상황도 두 번 일어난다. 첫 장면에서 누군가를 뽑아야 했던 이들은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뽑혀야 하는 상황으로 역전된다. 영화의 줄거리를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면, 면접 심사자가 면접 대상자가 되면서 끝나는 이야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종의 추락인가. 아니, 그것은 반대로 상승이다. 첫 장면을 상기해 보자. 더블웨미에서 신입 사원 면접을 보던 중 탈의실 천장에서 기척이 들린다. 천장에 놓인 금고를 노린 침입자가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구조를 요청하는 신세가 된 거다. 위에 있다는 것은 이렇듯 전능하면서 무력하다. 이 공간이 중요한 다른 이유는 그곳에 케이블이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 고장은 금고 털이범의 잠입만큼이나 더블웨미에 심각한 타격이다. 그곳을 찾는 손님들은 천장에 매달린 여러 대의 TV에서 나오는 경기를 보며 먹거리를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케이블 고장으로 방송 송출이 중단되는 일 역시 영화의 규칙대로 두 번 일어난다. 한 번은 천장에 잠입한 도둑을 구조하는 작업 중 케이블을 잘못 건드리면서 일어난 것이고, 두 번째는 리사 대신 매니저로 승진한 대니얼(샤이나 맥헤일)이 무례한 손님과 사장에게 항의의 의미로 부러 고장을 내버린 거다. 이로 인해 메이시를 비롯한 직원들은 바에 올라가 손님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분투한다. 누군가에게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서비스 노동자의 고단함이 담긴 추락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는 위치에 한정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상승이다. 손님들은 방송을 중계하는 TV 채널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바에 선 이들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 그 자리가 그들이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다.   



상승은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 더 일어난다. 면접을 끝낸 이들은 전 직장에서 훔친 술을 가방 두둑이 담고서 건물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고가 도로가 마주 보이는, 사방이 온통 하얀 옥상은 현실적인 장소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울고 있던 사람은, 다 괜찮을 거라고 위로의 말을 외치는 메이시를 보고는 무서워하면서 달아난다(정확히는 달아났다고 묘사다). 그들은 적어도 그 공간에서만큼은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세 명의 천사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서로 천사 혹은 슈퍼히어로라고 부른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자동차 소음이 해변의 파도치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리사의 말은 실제 그들이 처한 공간을 청량한 해변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것은 현실도피를 뜻하는 것도, 현실의 이겨낸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천사는 ‘더블웨미’라는 이상한 이름의 스포츠 바에 거한다. 그곳의 천사들은 날개 대신 누군가를 채워줄 버팔로윙을 들었다. 그들은 울고 웃고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이제 착륙할 다른 곳을 찾는다.


다소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영화의 이상한 시간성을 돌이켜보자. 영화는 하루의 시간을 그리고 있지만, 그 하루에는 과도할 정도로 많은 것이 응축되어 있다. 죽음을 앞둔 이의 시선에 그제까지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듯, 리사가 겪는 하루의 시간과 에피소드들에서 리사와 동료들의 삶이 고스란히 찍힌다. 팝업창이 뜨듯 사건이 이어짐에도 영화는 조금의 조급함도 없이 침착하다. 심지어 편집하지 않은 인간의 삶 그대로 무척이나 느리게 관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회사 CCTV에 손가락 욕을 날리는 리사의 모습과 메이시가 홀로 있는 리사에게 뜬금없이 매장용 폭죽을 터뜨리는 모습, 리사가 이웃 가게에서 얻은 하트 스티커를 직장 곳곳에 붙이는 모습 등 잉여처럼 보이는 사소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맥거핀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다고 해서 서사의 중심에 놓이는 것도 아니다. 사건은 쉴 새 없이 일어나지만, 종국에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변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마술과도 같은 시간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것은 마술적인 것의 재현과는 무관한, 가장 현실적인 펜으로 그린 마술이다.


그러므로 여기, 새로운 천사가 있다. 세속적인 펜으로 끄적인 닌자 걸처럼 수시로 업신여김당하고 조롱당하는 자리에 그들이 있다. 그들은 헤쳐 나가지 않는다. 고난을 주고 이들이 이겨내거나 스러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애초에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이들은 현실의 반응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상황과 선택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일이다.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무엇이 느껴지는가. 느낄 수 있는가. <그녀들을 도와줘>특정한 누군가의 현실을 그린 영화이기보다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 것인가를 근심하는 영화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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