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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쌤 Jun 01. 2022

매일 일어나는 감정 단어들이여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메일 일어나는 감정단어들이여~   

글 한편을 쓴다는 것은 나의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라고?

진짜라면 누가 글을 쓸까. 누구나가 잘 먹고 잘살고 잘 놀려고 글을 쓰고 돈을 벌고 성취하고 사는데 글을 쓴다고 수명이 단축된다면 누가 글을 쓸까.     

존 듀이는 90세까지 글을 쓰며 살았고 교육학에서 전 생애를 바쳤다. 책 목록만 해도 170쪽이 넘는다고 하니 수명 단축은 아니구나. 그렇게 수많은 글을 쓰고도 92세까지 살았으니. 여기서 집중되는 것은 70세까지 강단에서 강의도 하고 책을 집필했다고 하니 굉장히 건강한 체질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70세까지 일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이쯤에서 또 고민이 생긴다. 글을 쓰고 책을 집필했다는 것은 앉아서 뭔가 작업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다리가 고정되어 있으니 결국 몸은 정체되어 운동시간은 부족하고 내 몸에서 삐거덕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다.      

“너 왜 안 움직이니? 움직여”라고 소리친다. 그런데도 난 해야 할 과제에 목숨을 걸고 과제를 하고 있다.
몸은 자꾸 글 쪽으로 기울어지고 치우치고 있다. 집중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집중을 안 깨고 싶으니 계속 쓰고 있다. “아! 초고의 글한 편의 완성되었다. 만세!”라고 외친다.      

글 쓰는 사람


초고의 글을 묵힌다. 하루 이틀 다시 들여다본다. 어머나 왜 이리 고칠 게 많은지 이것을 보고 또 보고 퇴고를 한다. 퇴고를 해도 끝이 없다. 누가 그랬지. 퇴고를 많이 하다 보면 “나는 오늘 살았다.”라는 문장밖에 남지 않는다고, 그래도 퇴고는 해야 하니 말이다.  

때로는 귀찮아서 늑장을 부리고 있다. 2년 전 순희는 글 쓰는데 목숨을 걸었다. 하나하나 해내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거대한 꿈까지 꾸었다. 아낌없이 투자도 무엇이든 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자꾸 끄달리고 있다. 감정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에 끄달리지 말라고 뱉어놓고 내가 이렇게 질질 끄달리고 있다. 질질이란 단어는 참 듣기가 싫다.  “여자가 남자한테 질질 끌려다닌다.” “왕따 당하기 싫어서 친구한테 질질 끌려다닌다.”등 어감이 참 거시기하다. 그렇지만 이 질질도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다 괜찮다.    

이쯤에서 내가 어디로 튈까? 나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에도 생각이 필요하고 구조가 필요하고 행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난 생각도 없고 구조도 없이 그냥 아기가 아장아장 걷듯이 그냥 걸어가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얼음 위를 걷는듯하다. 이러면서까지 글을 써야 할까? 
    

그래 써보자. 학생들을 상담하다 보면 모습들이 참 다양하다. 부모의 깊은 관심으로 모든 것을 놔 버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애정을 달라고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아이도 있다. 그렇지만 부모는 자신의 안경 색에 따라 그저 자식을 키우면서 “나 잘 키운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으니 아프다. 아프다는 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학교에서는 서로 안 다칠세라 오두방정을 떨면서 회의를 한다.   
   

조직의 쓴맛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내 식대로 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 나의 의지를 다 펼치지 못하고 망구 따라야 한다. 혹시나 아이가 ‘살자’ 거꾸로를 하면 안 되니까 말이다. 이제 14살이 ‘살자’ 거꾸로를 잘 알기나 할까?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일까? 되짚어보면 정말 그 나이에 벅차다 싶으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니?”라는 어휘를 쓰긴 한다. 
      

친구 관계에서 내쳐짐을 받으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니?” 학원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가면서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뭐하겠니?”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보낸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제스처에 우리 어른들은 오두방정을 떨면서 오히려 더 부추기는 듯하다.
     

나도 어른이지만 어른들은 너무 가볍다. 자기 신변을 안 다치기 위해 가리 막을 치기 바쁘다. 솔직히 느껴진다, 안 다치기 위해 모든 장비를 갖춰 놓는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한다. 얼마 전 **사건으로 운영위원회에 두 번이나 참여를 했다.
     

한 명의 아이는 회의를 하는 도중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한 명은 “우리를 좀 품어 줬으면 이렇게 삐뚤어지지 않을 건데.”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이 가슴을 후벼 파듯이 아팠다. 정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품어 주고 보듬어 주고 이끌어주길 원하는데 어른들은 지적하고 벌주고 훈계하는 게 다니까 아이들이 더 삐뚤게 나가기 마련이다.      

이런 원리를 알지만 심리상담사로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 현장을 빠져나가 아이들을 보듬어 주고 알아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그러면 다행히도 아이들은 논 바닥에 물을 흡수하듯이 나의 말을 빨아들인다. 그래면 됐다. 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하다.   
   

아이들이라고 철없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라고 다 옳은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 식대로 아이를 다 키워놓고 이제 와서 외부 탓을 한다. “너희들이 좀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저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미 양육과정에서 각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보호자와 아이는 마찰이 생긴다.      

제삼자인 나는 멀찌감치서 본다. 그리고 어른에게 말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 생각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보자고요.” “어른이 걱정만 한다고 다 이루어진다면 계속 걱정만 하십시오. 아니잖아요.”라고 말을 전달한다.      

그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어른. 어른들은 고집이 세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다인 것처럼 한다. 조금만 신경 쓰면 답이 나올 텐데 확고히 ‘이래러 저래라’ 하면서 고집을 부린다. 그래 놓고 “아이가 고집이 세다. 무얼 해 먹고살려고 하노? 보니 답답하다.”라고 한숨을 쉰다.      

아이는 어른을 보면 답답하다. 서로가 거울이다. 그런데 그 거울의 상황은 잘 모른다. 그저 안타까워만 하고 있다. 제삼자 만이 알 수 있는 묘한 관계다. 사람은 앞면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오류를 범하며 사는 것이 정상이다. 눈이 360도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원하게 긁어줄 수 없다.
우리 어른들이여! 가끔은 오류를 범하지 마소서. 제발.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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